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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한의 다산학 이해와 그 의미 = Choe Ik-han’s Understanding of Dasan Studies and Its Signific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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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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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8(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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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ve in the early 20th century as a socialist, Choe Ik-han(崔益翰, 1897~?) was a figure who underwent a gamut of ideologies from Confucianism to socialism. When political activities encountered a crisi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1910~1945), he sought new breakthroughs in journalism, academic learning, and research on the classics. With the 1935 events commemorating the centennial of Jeong Yak-yong[丁若鏞. pen names: Dasan(茶山) and Yeoyudang(與猶堂)]’s decease and the project of compiling his Yeoyudang Jeonseo(與猶堂全書, Complete Works of Yeoyudang) as the occasion, Choe came to associate with nationalistic intellectuals─e. g., Jeong In-bo(鄭寅普, 1893~1950) and An Jae-hong(安在鴻, 1891~1965)─and went on to serialize Reading the Yeoyudang Jeonseo(與猶堂 全書를 讀함), a critique of Dasan studies(茶山學), in a periodical. Throughout his life, he consistently criticized Confucianism, which had been the legitimate ideology of the Joseon Dynasty and, in contrast, adopted a generally favorable attitude toward Western learning(西學). Indeed, even before dubbing Jeong a scholar of the Practical Learning(實學) school, Choe called the former a Western learning scholar. This was because he located an important origin of Jeong’s learning in Western learning, especially modern Western science. He highly esteemed the fact that Dasan had been capable of distinguishing between Western religion and modern Western science and independently using the new scientific knowledge of the modern era, not the religion.
In Choe’s view, Jeong had endeavored to present a theory of social reform based on scientific and rational thinking but had been unable to understand the motive power behind historical change and utterly failed to reflect on the rise of new classes. According to his evaluation, the Confucian Jeong inevitably came to reveal the limitations of his thought by failing to perceive clearly the interests and goals of which social classes his theory and arguments represented. Analyzing Jeong’s famous works─i. e., Wonmok(原牧) and Tangnon(湯論)─Choe stated that Dasan had: explained the process of origination of rulers in terms of the populace’s everyday needs and convenience, of their choice; opposed the theory of the divine right of kings; and acknowledged democratic institutions and the democratic spirit in principle. He acknowledged as an intellectual accomplishment the fact that Jeong had viewed the power in the hands of a minority of the ruling class not as an invariable constant but as a variable outcome of the process of historical change. In Choe’s view, however, Jeong had only been a moderate social reformist in the end, by no means a revolutionary with a rebellious spirit. According to his analysis, Dasan’s theories of reform had merely been ideas in the head of a great daydreamer and lacked the practicability and concreteness of social institutions. Choe pointed out as the philosophical limitations and problems of Jeong’s learning: the absence of reflections on the identity or nature of the inevitable motive power behind changes to objects and institutions; limitations in thought, thus inevitably locating concrete methods for inducing such change in the morality and political decisions of the monarch, or the highest power holder; and an utter failure to turn attention to the rise of new social classes equipped with the capacity for problem solving amidst current contradictions and dangers.
Choe thus criticized Jeong: though Dasan had expressed an independent position on politics, morality, and ethics, his political thought as a Confucian, based on the theories of royalism and monarchism, nevertheless had failed to secure a universal and global perspective. Highly praising the view based on the theory of social evolution and the universal orientation toward scientific knowledge exhibited by Jeong’s Giyeron(技藝論, A Theory of Skills), he regretted that ...
20세기 초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최익한崔益翰(1897~?)은 유학에서부터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 편력을 거친 인물이었다. 그는 식민지 시기 정치적 활동이 위기에 봉착하자 언론과 학문, 고전연구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1935년 다산 정약용 서세 백주년 행사와 《여유당전서》 편찬 작업을 계기로 최익한은 민족주의 진영 지식인들─정인보, 안재홍 등─과 교류했고, 정기 간행물에 『여유당전서를 독함』이라는 다산학 비평문을 연재했다. 최익한은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조선의 정통 이념이었던 유교를 비판했고, 이와 달리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대체로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는 다산을 실학자로 호명하기 전부터 이미 서학자라고 불렀다. 이것은 최익한이 다산학문의 중요한 연원을 서학, 특히 서양 근대과학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산이 서양종교(천주교)와 서양 근대과학을 준별하고, 종교가 아닌 근대의 새로운 과학지식을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점을 높이 샀다.
최익한은 다산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에 기반해서 사회개혁론을 제시하려고 노력했지만, 역사변화의 동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새로운 계급의 출현을 전혀 성찰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그는 유학자 정약용이 자기 이론과 주장이 어떤 사회계급과 계층의 이해관계와 목적을 대변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사유의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한다. 최익한은 다산의 유명한 논저들─「원목原牧」과 「탕론湯論」─을 분석하면서 다산이 통치자의 발생 과정을 인민 생활의 필요와 편리, 인민의 선택으로 설명했고 왕권신수설을 반대하였으며, 원칙적으로는 민주제도와 민주주의 정신을 시인했다고 보았다. 그는 다산이 소수 지배층의 권력을 불변적 상수가 아니라 역사적 변혁 과정의 가변적 결과로 간주한 점 자체를 중요한 지적 성과로 인정했다. 하지만 최익한이 보기에 다산은 결국 온건한 사회개량론자였을 뿐, 반역적인 정신을 가진 혁명론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다산의 개혁론이 위대한 공상가의 머릿속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제도의 실천성과 구체성을 결여했다고 분석한다. 사물과 제도가 변화하는 필연적 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의 부재, 그러한 변화를 이끄는 구체적인 방법을 최고 권력자인 군주의 도덕성과 정치적 결단에서 찾을 수밖에 없던 사유의 한계, 현재의 모순과 위험 속에서 문제해결의 역량을 갖춘 새로운 사회계급의 출현에 전혀 주목하지 못했던 점 등을, 최익한은 다산학문의 철학적 한계와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최익한은 다산이 정치와 도덕ㆍ윤리 영역에서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입장을 피력했지만, 그럼에도 왕정론과 군주론에 기반한 유학자 다산의 정치적 사유는 보편적인 세계적 시야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다산의 「기예론」이 보여준 사회진화론적 시각과 과학지식에 대한 보편적 지향을 극찬하면서, 「기예론」에서 보인 이 같은 보편적 시야를 다산이 조선사회 전반에 적용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했다. 말하자면 과학적 신지식에 대한 안목으로 유학자 다산이 군주정과 왕정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변혁과 새로운 계급의 출현을 사유하지 못한 점을 비판한 것이다. 유학자로서 다산은 유교의 인륜적 가치와 도덕규범을 믿었고 유교사회를 떠받드는 현인군주의 왕도정치를 이상적 정치체로 지향했다.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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