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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당항성 전투’의 역사적 실상 = The historical reality of the battle of ‘Danghang castle’ during the period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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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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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meantime, it has been extreme confusion in the documentary record and researchers' discussions about the battle of ‘Danghang castle(党項城)’ in the Three Kingdoms period(三國時代).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related historical material from the basic point of view, the following history can be depicted.
In 643, Backje(百濟)'s King Uija(義慈王) pushed the attack on the Danghang castle to block Silla(新羅)'s lines of communication with Dang-China(唐). In order to overcome Silla's defensive network, which was concentrated on the traffic road around the Danghang castle, Backje's King Uija cooperated with the Goguryeo(高句麗), who was monitoring the military and diplomatic trends of Silla at the Han River(漢江) and the Imjin River(臨津江) estuary toward the West Sea(西海), and prepared for a considerable period of time. Through this, the king Uija tried to raid Danghang castle.
However, at the time when the three countries' secret war plans fiercely developed, such preparations had the adverse effect of releasing relevant information to Silla. Although Silla had already dispatched an envoy to Dang-China to ask for salvation, Silla sent another envoy to Dang-China to announce it. The delegation seemed to have delivered relevant information to Dang-China in November 643. And, as Baekje became aware of the information leak, the king Uija, who mobilized troops to attack Danghang castle in November 643, seemed to have stopped the attack, judging that the raid(surprise attack) was no longer possible. In other words, the king's attack discontinuance on Danghang castle was based on his own military strategic judgment, not on Baekje's relationship with Dang-China. Here, a part of Baekje foreign policy is revealed in this period.
At that time, Baekje had been pushed foreign policies that pursued both ‘goodwill against China’ and ‘attack on Silla’. In this context, cooperation with Koguryo seems to have been maintained at the level of ‘strategic cooperation’ rather than ‘military alliance’.
In the later days, Dang-China criticized Baekje for having had duplicity, but it was Baekje's foreign policy to maximize the security and purpose of self- country at that time. This was the result of inheriting his father's ‘two-way policy(兩端策)’. The reason why Baekje was able to use this foreign policy seems to be that it did not assume that the Dang-China could directly penetrate across the sea, believing different geographical advantages from Goguryeo as King Dang-China Taejong(唐 太宗)'s commentary in 643.
그동안 삼국시대 ‘당항성 전투’와 관련해선 문헌기록 및 연구자들의 논의 상에서 극심한 혼란이 빚어져왔던바, 관련 자료를 기초적인 측면에서 재검토한 결과 다음과 같은 역사상을 그려볼 수 있었다.
643년 백제 의자왕은 신라의 대당교섭을 차단하고자 당항성 공격을 추진했던바, 무엇보다 당항성 주변 교통로 상에 밀집되어있던 신라의 방어망을 돌파하려면 상당기간의 준비와 함께 당시 한강 및 임진강 하구∼서해상에서 신라의 군사·외교 동향을 감시하던 고구려와의 공조가 필수적이었다. 이에 의자왕은 고구려와 ‘화친’해 고구려의 전략적 협조를 이끌어내는 한편, 자체의 준비를 거쳐 당항성을 ‘급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삼국 간 첩보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상황에서 상당 기간의 준비는 관련 정보가 신라로 유출되는 역효과를 낳았고, 이에 신라 조정은 이미 643년 9월 구원 요청을 위해 입당한 견당사가 귀국하지 않았음에도 재차 견당사를 파견하였다. 해당 견당사는 같은 해 11월 입당해 당에 관련 정보를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 유출 사실이 백제에 알려지면서 643년 11월 당항성 공격을 위해 병력을 동원한 의자왕은 더 이상 ‘전격 작전’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하고, 공격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의자왕의 당항성 공격 중단은 자체의 군사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을 뿐, 당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이 시기 백제 대외정책의 일단이 드러난다.
당시 백제는 ‘대당 친선’과 ‘대신라공세’를 동시에 추구하는 대외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고구려와의 공조 역시 ‘군사동맹’이 아닌 ‘전략적 협력’ 수준에서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뒷날 중국 측 사서에서는 “百濟懷二”라는 프레임을 덧씌웠지만, 실상 이는 자국의 안위와 목적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당시 백제의 대외정책이었다. 이는 의자왕이 父王 무왕의 ‘양단책’을 계승한 결과였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백제가 이러한 대외정책을 구사할 수 있었던 요인은, 643년 당 태종의 논평처럼 고구려와 다른 지리적 이점을 믿고 당이 바다를 건너 자국을 직접 침입할 수 있다는 상정을 하지 않았던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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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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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9 | 0.69 | 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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