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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북경고려기독교청년회의 종교활동과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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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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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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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198(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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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 후 손정도ㆍ이대위ㆍ장자일 등 수명의 기독교인들은 유학의 목적으로 북경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3ㆍ1운동 후, 이용설, 한영복, 조영 등의 기독교인들이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일경의 검거를 피해 북경으로 망명하였다.
북경의 기독 청년들은 1919년 말부터 연해주와 만주 등지에 사람을 보내 기독교인들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대한독립청년단 등의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런데 마침 1920년 2월 북경에서 ‘미감리교회동아총회’가 열리고, 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북경에 온 감독 허버트 웰치, 선교사 노블ㆍ케이블ㆍ무어와 한국인 감리사 오기선ㆍ최병헌, 목사 김종우ㆍ안창호ㆍ배형식 등이 기독교청년회의 설립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기를 희망하였던 북경의 기독 청년들은 웰치 등의 제의를 받아들여 1920년 2월 10일 북경고려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燈市口의 公理會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창립 당시 동회의 회장은 이용설이었고, 총무부장은 심천, 운동부장은 김하선, 교육부장은 한영복이었다. 1922년 중반 이용설이 귀국하자 회장은 심천, 총무는 조영, 교육부장은 이윤재, 체육부장은 이병호, 간사는 이병화ㆍ최진 등으로 교체되었다.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유학생들이 피해를 입고, 일본유학비가 비등하자, 1923년말부터 북경에 유학을 오는 학생들이 대폭 증가하였고, 이에 따라 기독교인의 수효도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북경고려기독교청년회의 회원수는 44~45명에 이르렀다.
북경에 거주하는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의 기독교청년회원과 기독교인의 후원도 증가하였다. 세브란스 교수로 활동하였고, 당시 협화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있던 밀스, 감리교 목사 Wilder 등이 ‘청년회'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북경 기독교청년회의 고천우ㆍ장지신 등도 동회의 활동을 후원하였다.
북경고려기독교청년회는 1924년 초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가입을 신청하여 뜻을 이루었다. 1924년 7월에는 朝陽門大街314-1호에 북경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고, 동회의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이후 북경고려기독교청년회는 국내의 장로교ㆍ감리교연합회 본부, 북경의 협화교회, 북경 근처의 通州와 海甸교인의 후원, 북경교인들의 성금에 의하여 교회를 운영하였다.
북경고려기독교청년회는 회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기독인 유학생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동회의 회원들은 기고와 강연을 통하여 기독교인에게 청년회 운동의 중요성을 홍보하고, 겸애의 사상을 진작시키고, 민족의식의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경고려기독교청년회의 회원들은 3ㆍ1운동기념식 등의 기념식을 개최하거나 이에 참석하여 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집회와 시위에 참석하여 관동대지진 시 일본인의 학살만행을 규탄하고, 소비 에트러시아의 러일평화조약 체결을 비난하였다. 때로는 중국의 인민과 함께 항일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북경고려기독교청년회와 그 회원들은 설립 초기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비판하는 북경군사통일회의와 보합단 등과 함께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1922년 중반 이후에는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참여하여 실력양성ㆍ농장경영ㆍ한국독립당 결성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동 청년회가 세운 북경한인기독교회는 한인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위해 장소를 제공하였다. 북경한인기독교회는 교회의 예배당을 1924년 유학생 단체의 통일을 협의하기 위한 회의장소, 1926년에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기 위한 회의장소 등의 용도로 제공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북경고려기독청년회는 표면적으로 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나 실은 민족운동 및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결사체였다. 그리고 동회의 사무실과 동회의 회원들이 설립한 북경한인기독교회는 한인민족운동의 중심무대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Before and after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1919, a few young christians moved to Beijing. They are Lee Dae Wi, Lee Yong Sul, Shim Chun, Cho Young, and Han Young Bok. Some of them came there for independence movement, others came for studying and etc. They wanted to made a christian organization for independence movement in Beijing.
Fortunately, the East Methodist Churches General Council was opened in Beijing at 1920. Then H. Welch, W. A. NobleㆍE. M. CableㆍJ. Z. Moore, Oh Ki SunㆍChoi Byung Hun, Kim Jong WooㆍAhn Chang HoㆍBae Hyung Sik, who were a supervisor, missionaries, methodist district superintendents, and pastors, came to Beijing to attend the meeting. They met Lee Dae Wi, Lee Young, and etc, and persuaded this persons to organize a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for religion.
A few young Christians of Beijing organized ‘the Korean Men's Christian Association of Beijing’ as an intention for religion and independence movement at February 10th, 1920. The president of it was Lee Yong Sul, and the manager of general affairs of it was Shim Chun. The office was establishd at a room of the Gongleehoe(公理會) church, in Deungsigu(燈市口) of east castle(東城).
After Lee Yong Sul's returning to Korea in 1922, Shim Chun was appointed as the president, and Cho Young was appointed as the manager. In 1924, the members of ‘the Korean Men's Christian Association of Beijing’ were extended to 44~45 persons.
This Christian association joined the Choseon YMCA in 1924. Subsequently the members of it established the Beijing Korean Church at the Choyangmoon(朝陽門) main street 314-1 ho. And they moved its office from the Gongleehoe(公理會) church to this church.
The members of ‘the Korean Men's Christian Association of Beijing' worshiped God and kept X-mas together. They spreaded spirits of Christianity by writing for newspapers and magazines. They gave aids to Christians and common students to study abroad.
Out of the religious activities, they devoted themselves to independent movement. They inspired national consciousness to Koreans by opening and participating commemorative ceremonies. Some of them joined Heungsadan (興士團) and made their efforts for independence of Korea. And others endeavored at making a national party for Korea's Indepen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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