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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국왕의 점술 맹인 활용과 그 의의 = On the political use of blind fortunetellers and its significance by the kings of early Chosŏn
저자
최선혜 (미네소타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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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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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형태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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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24(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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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조선전기 국왕이 점술 맹인을 활용한 정치적 사회적 목적과 의의를 밝히는데 있다. 국왕은 권력의 가장 정점에서 유교에 따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는 사람이며, 맹인은 지극히 소외된 소수자로서 주로 점술로 삶을 영위하는 구휼과 자비의 대상이었다. 이 양 극단에 있던 사람이 점술을 매개로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그 관계는 전적으로 국왕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유교는 국왕과 관료를 중심으로 조직된 정치 질서의 동반자이면서 동시에 초자연적인 질서와도 연결되는 이념이었다. 따라서 유교적 의식은 개인의 신앙을 표현하는 의례로서의 성격을 넘어 매우 공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에 무당이나 승려는 국가의 공적인 의식에서 밀려났으며 그 소외의 정도는 점점 심해져 갔다. 점술인은 이와 다른 처지였다. 무당과 승려는 ‘司祭’로서의 역할을 가진 종교인이었던 것에 비해, 점술 맹인은 사제로서 의뢰자와 더불어 특정 종교의 의식을 함께 행하거나, 점술을 매개로 공동체를 형성·강화하는 성격은 약하였다. 이에 점술 맹인은 검교직 등을 지니고 국왕 가까이에서 점술인으로서 활동하였다.
국왕이 점술인을 활용한 까닭은 첫째 운명론과 관련하여서이다. 태조에게 새 왕조의 창업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거론된 논리는 물론 유교의 天命論이었다. 천명은 天子로 자처하는 帝, 王에게 天이 내리는 명령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소임과 권한을 의미하고, 일반인에게는 주어진 運命이나 本性을 뜻한다. 이 점에서 제왕이 받은 하늘의 명은 이른바 ‘天命’이면서 그의 ‘運命’이기도 하다. 점술인은 이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었다. 점술인이 왕의 운명을 占으로 논하는 것은 왕의 천명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답을 주는 운명 내지 팔자론을 통해 왕으로서의 명을 받았음을 내세우는 일은 정치적으로 매우 효과적이었다.
둘째, 가뭄이라는 天譴을 벗어나는 기우제와 관련하여서이다. 가뭄에 대한 시종일관한 논리는 군주에 대한 하늘의 견책이었다. 가뭄 해소를 위해서 군주는 더욱 삼가고 조심하여 하늘의 꾸짖음 앞에 근신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왕으로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한재를 당하여 근신하는 자세를 보이며 관료의 질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은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기우와 관련한 각종 행사를 정성스레 치르도록 관심과 후원을 보이며 이 부담을 덜고자 하였다. 이러한 필요 속에 국왕은 관료들의 부정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맹인을 내세운 기우제를 내내 시행하였다. 맹인이 왕명에 의해 비를 비는 것은 국왕이 맹인을 통해 비를 주관하는 천신에게 기원하는 일이다. 국왕은 점술 맹인을 가까이에 두고 가뭄을 이유로 군주를 압박하는 관료의 입김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셋째, 왕실의 혼사와 관련하여서이다. 왕은 점술 맹인에게 직접 명을 내려 당대 왕실과 혼인을 맺을만한 집안을 방문하여 해당자의 八字를 점쳐 올리게 하였다. 왕실의 배우자를 결정하는데 점술 맹인이 올린 팔자는 혼사의 가부를 결정짓는 주요한 요소였다. 점술의 결과에 따라 그 혼사가 좌우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국왕이 이처럼 점술인을 활용한 배경은 국왕이 가장 의식해야 하는 사대부 역시 일상적인 삶에서 점술에 매우 가까이...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shed a light on the use of blind fortunetellers by the kings of early Chosŏn from a political and sociological aspect. In Chosŏn, the king was a person of the highest authority who's duty was to govern the people, while the blind were an isolated minority, The blind were objects of social relief and mercy. Though they were of most opposite polarities in Chosŏn society, the two groups maintained a relationship by means of divination and oracle of the blind fortunetellers, This particular relationship was entirely by the need of the king.
In Chosŏn, Confucianism was a political partner of the sociological order of kings and aristocrats, and it was also a philosophy regarding supernatural order. Thus Confucianistic rites evolved from a personal representation of faith into a ritual of national and political importance. Hence, shamans and monks were gradually excluded from the rituals of national importance. This degree of exclusion only increased as time passed. A blind fortuneteller was not a priest(司祭), unlike a shaman or a monk. Also, blind fortunetellers were not performers of certain rites and they also did not form any communities regarding any religious rituals.
There are many reasons why a king would want to make use of a seer. First of all, it was because of the theory of destiny, which was a Confucianistic idea. For Taejo(太祖) it was very important to assure justness as a founder of a whole new dynasty, Chosŏn. In order to do this, the most importantly discussed theory was the theory of the mandate of Heaven(天命論). The mandate of Heaven(天命) means a mandate(運命), that the Heaven have given to the king, who was supposedly the son of Heaven, For the king, this mandate, contained the right and duty to govern the people. While to the average person, it meant destiny(運命). A blind fortuneteller was a person who tried to see into this same fate. Thus, envoking the authority of this theory of destiny(運命論), which was from Heaven, gave an assured answer to the justness of the king.
Second, it regarded a ritual for rain(祈雨祭), which was a means of escaping Heaven's rebuke(天譴). Heaven's rebuke, another Confucianistic idea, was often regarded as prolonged drought. The opinion theorized about drought was that it was a punishment, or rebuke, of Heaven to the king. To solve the drought, it was emphasized that a king had to be penitent in front of the Heaven's mandate. For a king, it was a great burden to endure the lashes of the aristocrats. For many aristocrats did seek to admonish the king of the consistent droughts. Thus, the king wished to resolve his burden by supporting and taking an interest in various ceremonies regarding a ritual for rain. In need to do this, the king continuously conducted a ritual for rain's led by the blind fortunetellers. When a blind fortuneteller prayed for rain in the name of the king, it was in actuality the king praying via the blind fortuneteller for rain, to the god of the skies. By conducting such well-organized and high-class rituals, the king resolved the anger and admonishment of his aristocrats. Also, he could lessen his burden as one who is governed by Heaven's mandate. Thus when a king kept the blind seer close to him, he could lessen the criticism regarding droughts, of his royal courts.
Third, it was because of the royal matrimonies. When a royal matrimony was planned, the kings of Chosŏn directly commanded the blind fortuneteller to visit the family which was to be married with the king's family. Then the blind fortuneteller would take a fate(八字) of candidates, and report it to the king. This report of the blind fortuneteller was a very important source for the king to decide if the marriage was to go through or not. It was because the results of the fate could even affect the state of the marriage itself.
The kings of Chosŏn had to always be aware of the literates. In using the fortunetellers, the ...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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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6-06-10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전남사학 -> 역사학연구 | KCI등재 |
2006-03-21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전남사학회 -> 호남사학회영문명 : Chonnam Historical Association -> Honam Historical Association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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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8 | 0.68 | 0.68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63 | 0.6 | 1.183 | 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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