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1920년대 천도교인 朴達成의 사회 종교관과 문화운동 = Park Dal-sung's Views of Society and Religion, and His Cultural Movements in 1920s
저자
조규태 (한성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1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7-44(38쪽)
KCI 피인용횟수
7
제공처
This thesis is a paper of a believer of Cheondogyo, Park Dal-sung's views of society and religion, and his cultural movements in 1920s. In this paper, first, I reviewed the reason of his entering a faith and his education of Cheondogyo doctrines. In the second place, I examined his views of society and religion and his thoughts of Cheondogyo. Finally, I considered the cultural movements that he did as a member of Young Men Cheondogyo Association and Young Men Cheondogyo Party.
Park Dal-sung was born as a son of a moderate farmer on Taechon, Pyeong-an-buk-do, in 1895. He entered the Donghak under the guidance of his father. After Donghak's change to Cheondogyo, when Cheondogyo pushed ahead with modernization, he benefited from that. Having studied at the church doctrine school and Bosung high school, he had gained civilization theory, social darwinism, individualism, and liberalism.
After 3ㆍ1 Movement in 1919, he came to Seoul. And he spreaded cultural movement theory as one of reformation thoughts, in accordance with the movement theory of Young Men Cheondogyo Association.
He believed that ideal society would be erected by ability and force. And he thought that the foundation of making ideal society was ego or self. By the way, he thought that religion was very important for education of human being. Especially, he was convinced that Cheondogyo was very unsuitable in that it had emphasized human being and gaebyuk, a reformation.
Park Dal-sung, who wanted to make ideal society by virtue of education of human being, advocated culturism and spiritualism from 1920 to 1923. He wrote many articles to support them in Gaebyuk and Cheondogyohoeweolbo. Also he did public lectures to support cultural movement theory traveling through out Korea. Since 1923, he developed cultural movements emphasizing on education of self-reliant and self-supporting human being. Especially, he threw his effort into made his effort on education of young men, women, peasants.
이글은 1920년대 천도교의 대표적 문화운동가인 박달성의 사회ㆍ종교관과 문화운동에 대하여 살펴본 글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박달성이 동학에 입교한 배경과 입교 후의 교리의 학습 과정과 학습 내용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이어 박달성의 사회관과 종교관, 그리고 그의 천도교에 대한 인식을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박달성이 천도교 청년단체의 주역으로 전개한 문화운동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1895년 평북 태천의 궁벽한 시골, 그리 넉넉하지 않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달성은 1902년 아버지의 인도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로 명칭을 바꾼 후, 교제와 교리와 교인의 근대화를 추진하자, 그는 그 혜택을 입었다. 그는 천도교의 교리강습소와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근대적인 교리와 지식을 수용하면서 서구의 문명개화론과 사회진화론,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상 등을 수용하였다.
3․1운동 후, 개조의 물결 속에서, 그도 당시를 평등하고 자유롭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조의 시대라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동력을 실력․강력과 자기․자아, 즉 자력(自力)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의 사회는 종교의 중요성이 부각될 것이고, 그 종교는 후천개벽과 인내천을 종지(宗旨)로 하는 천도교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인간에 대한 교화로써 종교적인 이상사회를 만들기를 희망하였던 그는 이상적인 사회의 건설에 있어 정치체제나 사회구조의 변혁을 통하기보다 정신개조, 즉 문화의 변화를 통한 방법을 중시하였다. 먼저 그는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도교청년회의 회원으로 기고, 순회강연 등을 통하여 자주․자력의 정신을 갖춘 신인간을 형성하고, 이를 토대로 농촌문제, 교육문제, 의식주문제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라는 문화운동론을 전파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1923년 9월부터는 천도교청년당의 간부로 청년부과 농민부 등에서 자립적이고․자력적인 새로운 청년과 농민 등을 육성하는 부문운동을 전개하였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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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12-23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Journal of Donghak Studies ->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 KCI후보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7 | 0.7 | 0.62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8 | 0.55 | 0.797 | 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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