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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기 성리학자의 불교 인식 = Neo-Confucians` Perception of Buddhism in the early days of the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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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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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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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5(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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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성리학과 불교의 상호 인식을 통하여 한국중세 종교 사상의 정치사회적 기능과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려는 것이 본고의 과제였다. 고려말 성리학을 수용한 유학자들은 불교와 유교의 이치와 지향이 같다는 유불동도론을 전개했다. 그리고 삼교일리론를 통하여 유불도 삼교가 마음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색은 불교적 효행이나 유교적 효행 모두 효행(孝行)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기화(己和)는 승려의 출가가 효의 상도에는 어긋나는 것일지 모르나 오히려 권도를 취해 극진한 효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유교와 불교의 윤리 기능은 평화롭고 행복한 인간의 삶을 지향하여, 마음의 안정과 이를 통한 가족, 사회, 국가의 안정 도모를 기약 할 수 있다. 한편 성리학에 충실한 정도전 등은 유학을 정통, 정학으로 보고 불교를 이단을 정학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고, 유교의 삼강오륜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조선건국후 성리학을 국시로 정해지자 불교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은 재편된 지배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불교적 요소는 용인하였고 오히려 활용하였다. 태조는 승려를 왕사와 국사를 임명하였고, 내불당을 두었다. 왕실에서는 사후(死後) 명복(冥福)의 기원이나 천변지개(天變地災), 질병(疾病) 등 인간적 재난을 소재(消災)하려는 불교식 기복적 의례가 행해졌다. 언문 불교 경전도 간행되었고, 승려를 부역 노동에 동원하였다. 성리학의 불교비판은 왕조 창업자 입장에서 체제이념 혹은 정치사상으로서의 견해이며, 일반 사대부의 의식이나 민간에서 심지어 왕실에서는 여전히 불교와 도교 민간 신앙이 지배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억불의 대상이 된 불교는 엘리트 불교에 한정된 것이고, 서민적인 불교는 민간신앙으로 기층사회에 남아 그 명맥을 유지되었다.
더보기Examined in this article is the mutual perception exchanged by Neo-Confucian scholars and Buddhist believers in the ending days of Goryeo and early days of Joseon, in order to determine the historical meaning and significance of medieval religions and philosophies which did play a political and social role as well. The Confucian scholars in the ending days of Goryeo who embraced Neo-Confucianism supported the notion that the logic and goal of both Buddhism and Confucianism was virtually the same. They also argued that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all had their bases in the human heart, based upon the notion of "Three School of Thoughts(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sharing the same logic." Yi Saek uttered that a Buddhist act of filial piety and a Confucian act of filial piety were exactly the same. Gi``hwa(己 和) argued that although a Buddhist priest leaving the secular world may seemingly contradict an individual``s obligation to observe filial piety, but in a way it was also an act of demonstrating sincere respect for the parents. The moral values of both Confucianism and Buddhism were considered as methods that would ensure a happy and peaceful life, as well as a well-soothed mind that would contribute to the safety of not only the family but society and state. In the meantime, Jeong Do-jeon and others who were more faithful to Neo-Confucianism considered Confucianism as the orthodox form of thought, and perceived Buddhism as heretical. They wanted to create a society that would operate on a Confucian devotion determined to prioritize the so-called "Three Bonds and Five Relationships(三綱五倫)." And when Joseon was finally founded and Neo-Confucianism was fixed as the leading ideology, critical perception of Buddhism only continued to deepen.Yet Joseon did tolerate Buddhist elements within the Korean tradition which were deemed necessary in maintaining a ruling structure for the dynasty. Founder king Taejo appointed renowned Buddhist priests as State and Royal Masters, and had a Buddhist Shrine(Naebul-dang) inside the palace. The Royal family members regularly observed Buddhist rituals, to mourn for the dead or repel natural disasters or even evade sickness and despair. Buddhist classical texts were published in Korean letters, while Buddhist priests were drafted in social labor services. Neo-Confucian scholars`` criticism of Buddhism was a political one needed to create and rule a country. Ordinary scholar-officials and civilians and even the Royal family members maintained their faith in Buddhism, Taoism and other folklore beliefs to a certain degree. Elite Buddhism in the past was the portion of Joseon Buddhism that was oppressed, and common Buddhism remained within in the society and lives of individu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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