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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지역 유찬희의 민족운동 = Yoo Chan-hee’s racial movement in Manchu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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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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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희는 1900년에서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추진했던 민족운동의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는 인물이다. 그는 1883년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오경을 배웠고 17살이 되는 해에는 서울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사상을 접한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신사상을 수용한 유찬희는 유연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고 초창기에는 의병활동에 투신한다.
하지만 의병투쟁은 일제의 토벌작전으로 인해 한계에 부딪히고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자 유찬희는 서북학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유찬희는 서북학회를 통해 이동휘를 비롯한 기독교민족지도자와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유찬희는 그의 민족운동 기저를 형성하는 기독교민족주의를 수용할 수 있었고 강원도 이천군 교회운영에서 나아가 가솔들을 이끌고 북간도 국자가로 이주한다.
1918년부터 유찬희는 대표적인 북간도 한인지도자로 부상한다. 특히 그는 무악흥업회사를 경영하며 실업가로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다. 유찬희는 안정적인 자금력을 통해 파리강화회담 대표파견 기부금 모연, 민족학교 설립 자금 보관 등에서 주도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로써 유찬희는 한인사회에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고 여러 민족단체의 재무부문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와 한인상무총회 활동 이후 유찬희는 북간도지역 민족운동단체 대한국민회에서 총기구입위원으로 활동한다. 이어 참모장으로 영전된 그는 총기뿐 아니라 군량, 부대이동 등 구춘선, 홍범도, 안무 등과 함께 독립군의 제반 업무를 살핀다.
봉오동전투 이후 유찬희는 액목현에 은거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지역 독립군의 동향을 대한국민회에 보고하고 김일을 비롯한 의기청년들과 교류하며 일본군의 움직임을 내사한다. 하지만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대한국민회가 추진하던 무장투쟁이 어려워지자 유찬희는 공산주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그가 공산주의자로 완전히 돌아선 것은 아니라 판단된다. 오히려 그는 고려공산당 참사로 활동하지만 기존의 목회활동에 더 치중했고 남감리교 선교단의 일원이 되어 활약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찬희의 고려공산당 가입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 이후 무장투쟁이 어려워진 현실 속에서 실천적 독립운동의 한 방략으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유찬희는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ㆍ1운동 제7주기기념행사를 추진하여 1,500여 명의 재러한인들에게 항일사상을 일깨운다.
의병투쟁, 애국계몽활동, 기독교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활동, 대한국민회를 통한 무장투쟁, 고려공산당 활동, 동성노농공사에서의 농민운동까지 유찬희는 시기와 상황에 맞춰 독립운동의 방략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자신의 실업가적인 특질을 토대로 총무, 재무 등 민족운동단체의 실질적인 직위에서 활동하였다. 그렇기에 유찬희의 민족운동과 향배를 연구하는 것은 구한말에서부터 1920년대까지 국내와 북간도, 러시아일대에서 시기적으로 변화하는 독립운동의 흐름을 추적해볼 수 있는 하나의 유형인 동시에 실업가적 특질을 갖는 민족운동가에 대한 고찰이 될 것이다
Yoo Chan-hee is a nationalist activist born in Geumcheon, Hwanghae Province in 1883. His ideological foundation was rooted in neo- Confucianism education of his childhood school seodang and modern education received in Seoul’s PaichaiHakdang. In particular, Yoo Chan-hee embraced Christianity at the Paichai Hakdang, which served as bedrock of his national movement.
In 1907, Yoo Chan-hee left the Paichai Hakdang to join independent patriot Cha Dosun’s righteous army. Yoo physically fought against the Japanese military police in Goksan by carrying out arson attacks with his cousin Yoo Myung-hee. Subsequently, Yoo Chan-hee joined the North-West Society to engage in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Yoo Chan-hee settled in Yanji, China and established the Taekwang School, which means light of the national Korean flag Taegeukgi. As a principal, he supervised school operations and sought to raise awareness of national consciousness by educating the Koreans living in Yanji. In addition to educational movement, Yoo Chan-hee actively promoted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autonomy group Ganminhoe in the North Gando region, establishing under alias Doseong. As the leading Korean social organization in North Gando, Ganminhoe conducted census research and established private schoolfor education.
Yoo Chan-hee served as the secretary of the Ganminhoe and orchestrated major operations, influencing both the Chinese and Korean societies. He formed a large-scale mutual financing association by rallying enlightenment activist Jeong Jae-myung and other key figures of Ganminhoe. The financing association was operated by issuing lottery tickets, and its profits were used to operate national education schools. In addition, Yoo Chan-hee expanded informal youth gathering to conduct practical operations of Ganminhoe.
In 1916, Yoo Chan-hee achieved great economic success through the Muhak Industries. As Yoo Chan-hee became one of the prominent store owners in Yanji, he assumed substantive national movements through considerable capital. In 1919, the fir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March 1st SamIl movement, took place in Longjing Village, Machuria. Yoo Chan-hee made speeches to promote national consciousness, alongside Christian national leaders in the North Gando region, such as Choi Il, Kim Young-hak. Yoo’s son Yoo Ki-seok joined the Chungreoldan to print national flag Taegeuki and flyers for independent protests.
After the March 13th independence movement, Yoo Chan-hee moved to Vladivostok and subsequently joined the Korean General Assembly Sangmuchonghoe and the Korean National Council Daehankukminhoe. In particular at the General Assembly, he served as the vice-chairman, which indicates that the Korean-Russian community recognized Yoo’s financial competency. Upon returning to Gando, Yoo Chan-hee joined the Korean National Council and became a committee member in charge of purchasing firearm. The Korean National Council represented the North Gando province and was a national movement group that supported independence war. As Yoo was a firearms purchasing committee member, he was responsible for arming the troop that was under the auspice of the Council. Furthermore, Yoo Chan-hee assumed the chief of staff role, serving alongside Hong Beom-do, ChoiJin-dong to lead the army and victory of Bong-o-dong.
After the battles of Bong-o-dong and the invasion of Cheongsan-ri, Japanese imperialists sent large-scale troops to Gando to retaliate. Yoo Chan-hee, who became the head of financial affairs of the National Council, received An Jung-geun who was dispatched from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thereby serving as a communication link between the Council and the government. Additionally, Yoo contacted Meng Boo-duk who was attacking the independent army to allow for a month of troop movement, minimizing the damage to the army.
In December 1921, the leaders of the Korean National Council, such as Yoo Chan-hee and Kim Jung-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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