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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공주 유구지역의 피난민 정착촌 형성과 직조업 = Establishment of Refugee Settlement and Weaving in Gongju Yugu Area in the 195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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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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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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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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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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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피난민의 유구지역 이주 동기 및 정착 과정을 재구성하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이다. 또한 피난민 정착촌으로서 유구를 다시 보며, 이들의 정착과정에서 작동한 동향인 네트워크의 구체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공주 유구의 피난민 정착 사례는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이 정착지를 찾아간 경로와 자신들만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유구는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500여 가구가 생활하고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벽지였다. 유구에 인구가 급증한 시기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정감록에 나온 십승지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피난민이 살 곳을 찾아 몰려왔다. 보다 직접적 이유는 1950년대 초반부터 유구에 직조업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직물의 절대수요가 증가하고, 직조기의 비중이 동력에서 인력으로 옮겨가면서 1950년대 영세직조업에는 호황기가 왔다. 당시 직물은 생산과 동시에 판매되었으므로 자본으로 빨리 전환되어 피난민들의 지역 정착을 도왔다. 유구에 정착한 황해도민들은 적극적으로 친인척을 유구로 불러와 직조업에 종사하게 하면서 가계를 일구어 갔다. 이들은 전국에서 친척들을 찾아와 집을 지어주거나 수직기를 만들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정착조건을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모인 피난민들은 또 다시 흩어진 가족들을 유구로 불러왔다. 피난민들은 유구에서 교회를 개척하거나 개간을 해 ‘신설동’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의 동향인 연결망은 친인척 및 혼인관계로 촘촘히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직조업이 있었다. 이들의 연결망을 중심으로 직조공장은 약 250개로 늘어나고 직물조합이 설립되는 등 유구는 피난민들에 의해 활기를 띄어갔다. 그러나 1950년대 정부의 원조배분정책에 수혜를 받은 대규모 면방직공장들이 성장하면서 전국적으로 인견직생산은 급격히 쇠퇴했다. 전력사정이 나빠 수직기로 직물을 생산해오던 유구의 직조업은 크게 타격을 입어 1960년대부터 쇠퇴일로를 걸었다. 그럼에도 피난민들은 짧은 기간 동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구지역에 정착촌을 일구고자 하였으며 1950년대 피난민들이 직조업을 중심으로 유구에 정착해간 과정은 현재 유구에 중요한 지역정체성을 마련해주었다.
더보기The first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construct the motives of refugees for migration to Yugu area and the settlement process during the Korean War. This paper also aims to reconsider Yugu as a settlement for refugees and analyze concrete characteristics of networks among refugees from the same provinces during their settlement process.
The refugee settlement case in Yugu, Gongju demonstrates the refugees’ process of finding a settlement and creating their own living foundation during the Korean War, in detail. Before the liberation, Yugu was a remote village where about 500 households lived and electricity was not supplied properly.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the population in Yugu began to rapidly increase and a lot of refugees crowed into this area, since this was mentioned as Sipseungj in Jeonggamrok. A more direct reason was because that starting the early 1950s, the weaving industry began to be formed.
The absolute demand for fabrics rose due to the Korean War and with the shift of the proportion of looms from power to human resources, in the 1950s, small weaving businesses faced prosperity. At that time, fabrics were sold as soon as they were produced and the swift conversion to capital helped refugees settle down in this region.
Refugees from the Hwanghae Province were active in bringing their relatives over to Yugu and they made their livings, engaging in the weaving industry. They provided settlement conditions actively by building houses for their relatives, who were scattered all over the country, or making hand looms for them.
Refugees coming together this way brought their separated families over to Yugu once again. Refugees pioneered or opened Christianity in Yugu and created ‘Sinseol-dong’. In that process, the networks among refugees from the same provinces were tightly formed with relatives and in-laws. At its core, the weaving industry functioned.
Yugu became activated by refugees while weaving factories increased to nearly 250 and a weaving association was founded, focusing on their networks. But in the 1950s, large-scale cotton textile factories obtaining benefits from the aid allocation policy of the government grew and rayon fabric production rapidly decayed throughout the country.
Fabric production of the weaving industry in Yugu relied on hand looms because of the poor power condition. For this reason, the industry suffered greatly and from the 1960s, it began to decline. Nevertheless, refugees strived to cultivate a settlement in Yugu area, seizing the opportunity for a short period of time and the refugees’ process of settling down in Yugu in the 1950s, based on the weaving industry provided a significant regional identity to Yugu of the present time.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3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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