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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평택지역 계몽운동의 전개양상과 성격 = Development and characteristics of the enlightenment movement in Pyeongtaek area during the Korean Empire Period
저자
서태정 (수원박물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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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2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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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87-126(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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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지역은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동학과 기독교 등의 유입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20세기 초반 경부선 개통에 따라 상업중계지로서 성장하는 주요한 계기였다. 철도 개통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근대 도시 중 하나이다. 이는 주민들에게 급변하는 시대상을 직접 목격ㆍ체험하는 현장이었다.
이곳 최초의 공립학교인 진위소학교는 1898년 사립으로 설립되어, 주민들의 청원에 의해 1899년 공립화되었다. 설립자인 이범철은 신문과 잡지, 열국사기 등을 통해 조선이 처한 현실적인 문제를 두루 인식하였다. 국가적인 위기상황 타개를 위한 방책은 근대교육 진흥임을 강조했다. 이는 의무교육 시행을 역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학교 운영에서 파생되는 재정적인 문제 등을 해결하고자 흥학회를 조직하였다. 근대교육운동 실천을 위한 장기적인 방책은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주민들 또한 시세변화와 더불어 근대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는 상황이었다. 학교 유지를 위한 자발적인 모금과 유지회 결성 등은 이를 반증한다. 근대교육에 대한 열망은 사회적인 책무로서 인식되는 분위기였다.
사립교육기관은 보통소학교 과정 외에도 사범양성학교ㆍ노동야학회ㆍ강습소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1906년 고종의 ‘사학설립 조칙’ 반포 이후 전현직 지방관들은 사립학교설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는 을사늑약과 통감부 설치 등 일제의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상황과 맞물려 전개되었다. 근대교육은 부국강병을 위한 시무책이자 국권회복 일환임을 의미한다.
1907년 3월 평택군 주사 박준화와 진위공립소학교 교원 윤대선의 국채보상운동 참여에 대한 격절권고는 경쟁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신문기사에 나타난 모금자는 전ㆍ현직 관료나 유림ㆍ계몽운동가뿐만 아니라 여성ㆍ학동ㆍ상인ㆍ종교인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다. 특히 학동들은 저녁 끼니를 아껴 의연했으며, 단체조직이 전무했던 여성 참여도 두드러졌다. 이는 민중들의 각성과 현실인식 심화로 이어졌다. 경험적인 산물은 ‘사회적인 책무’를 자각하는 주요한 계기였다.
사립학교 설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은 부국강병을 위한 문화계몽운동이지만 ‘국권회복’을 추구하는 시발점이었다. 평택지역 학교 설립의 주체자 중 국채보상운동 참여 역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흥학회의 발기인인 진위군수 백남규와 이범창ㆍ이범철과 진문소학교의 교원인 고제항, 마두리 사숙의 설립자 이병철도 국채보상 모금에 참여하였다. 이는 학생들 참여와 일반 민중들의 각성으로 이어졌다. 사회운동의 참여는 당시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요인이었다.
계몽운동을 주도한 계층의 차후 행방은 대부분 모순된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혁하기보다 원만한 타협을 추구하였다. 진흥의숙 설립자 이범창은 대동학회 회원, 진위군수 김영진은 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올랐다. 이들은 사회진화론 영향으로 다양한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문명개화론에 매몰되어 약육강식을 현실적인 사회질서로서 수용하는 등 한계를 보였다. 이는 대한제국기 계몽론자의 인식 한계이자 계몽운동이 지닌 한계점이었다.
Due to its geographical advantages, Donghak and Christianity entered Pyeongtaek area more easily than to other regions. With the opening of the Gyeongbu line in the early 20th century, Pyeongtaek area became one of the modern cities that quickly developed as a center of commerce. The residents had an opportunity to observe and experience the quickly changing phases of the times.
The first public school was Jinwi Elementary School, which was established in 1898 as a private institution, but changed into a public school in 1899 with the petition of residents. The founder Lee Beom-cheol fully recognized the realistic issues of Joseon from newspapers and magazines. He emphasized the promotion of modern education to overcome the national crisis. He organized Heugnhak Hoei to solve any financial problems derived from operating school. This was a long-term measure to practice the campaign for modern education. Residents also felt the necessity of modern education amid the changes in the times. Efforts to maintain the school such as voluntary donation and formation of Yooji Hoei show how strong their desire was. The desire for modern education was perceived as a social obligation.
Other than the elementary school course, private institutions like normal schools and labor night schools were operated. After Emperor Gojong‘s ’Rotyal edict on Private School Establishment‘ was promulgated in 1906, former and current local government officials began to participate more actively in movements to establish private schools.
In March 1907, the participation of county clerk of Peongtaek Park Joon-hwa and a faculty at Jinwi Public Elementary School Yoon Dae-sun encouraged an aggressive participation. Donors listed in the newspaper included not only former and current government officials and enlightenment movement activists but also women, school children, merchants and religious leaders. Fruits from the experience were the crucial motivator that awaked ‘social obligations.’Movements to establish private schools and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were culture and enlightenment movements that aimed to enhance national prosperity and defense, but also were the starting point that called for the ‘recovery of the sovereignty of the nation.’ This is the reason why it is not difficult to find people who were founders of schools in Pyeongtaek area who were also a participant of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Founder of Heunghak Hoei Nam-gyu Baek Lee Beom-chang, Lee Beom-chul, the teacher of Jinmun primary school Ko Je-hang, and founder of Madoori private school Lee Byeong-chul also had participated in the national debt repayment donation. This effort was continued through the participation of students and the public.
The ones who led the enlightenment movement later sought after amicable agreements rather than trying to actively reform the contradicting reality. Later, the founder of Jinheungeuisook Lee Beom-chang became a member of Daedong Society, and the governor of Jinwi Kim Young-jin became a government general, Jungchuwon counsellor. With the influence of the theory of social evolution, they participated in various enlightenment movements. However, the movement hit a limit as it was buried by the civilization-enlightenment theory, and as people accepted the law of the jungle as the realistic social order. This was the limit of the understanding that enlightenment movement activists during the Korean Empire Period and the enlightenment movement itself h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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