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 채용신(1850-1941)고 : 생애와 작품에 보이는 근대성을 중심으로 = On Chae Yong-sin (Penname: Seokji)(1850-1941) - With a focus on his life and the appearance of modernity in his objects
저자
전인지 (국립중앙박물관)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1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900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777-797(21쪽)
제공처
소장기관
석지 채용신은 대표적인 근대기 초상화가로서 일생의 절반은 무관으로서, 어진도사 화가로 서의 영예를 누렸으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국운이 쇠하자 낙향하여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위정척사계열의 독립지사들과 교유하며 항일운동적 작화활동을 시작한다. 본고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채용신 초상화의 특성을 ‘근대성’ 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해보려고 하였다. 채용신 초상화의 근대성을 이루는 요소들을 전대와 비교하여 몇 가지 지적해보자면, 첫 번째로 주제·의미에서 보이는 근대성으로 그가 그린 고종어진들에서 살펴 볼 수 있는바, 그로 인하여 어진이 가지고 있었던 의미가 변질, 약화되고 누구나 모실 수 있는 숭모의 대상으로 ‘저변화’ 되었다는데 있다. 그것은 채용신이 고종어진의 초본을 유출하여, 민간의 수요에 부응하여 제작하였기에 이러한 저변화를 촉발, 진행시킨 원인 제공자가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그가 그린 단독 여인상, 부부상의 존재이다. 채용신의 시대에 와서는 여인상 제작에 있어서 유교적 제작명분의 제약이 없어지고, 내외법의 엄정함도 누그러진듯 여인상의 제작 예를 제법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부부상이 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상의 제작과 부부상의 제작사실 자체가 근대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채용신은 1918경에 이르러 여러 신분의 인물을 그려내게 되는데 초상화를 그리는 데 있어서 이러한 신분제약의 탈피 또한 근대적 요소이다. 이외에 표현기법의 측면에서는 ‘사진술의 활용’을 들 수 있다. 사진은 석지에게 있어 대량주문제작시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서 의미를 가지며, 앞서 추측했듯이 여인상을 그릴 때의 내외법을 해결해주는 방책이 되지 않았을까 본다. 마지막으로 작품 주문·제작방식의 근대성으로서 1940년경 배포된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의 광고전단문에 의하면 광고는 당시 만 90세였던 채용신을 전면에 내세워 대대적으로 초상화의 주문제작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내용은 석지의 화가로서의 명성을 홍보하고 작품요금을 작품형식에 의하여 꼼꼼히 정하여 제시하고 있다.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양측의 조건과 의무를 꼼꼼히 명기하고 있어 매우 근대적이고 상업적이다. 그러나 그의 초상화에서 여러 가지 근대적 요소를 지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지배했던 가치는 유자적 삶이며, 임금을 모시면서 충성을 다하며, 우국충정을 다짐하는 사대부의 전범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 가치와 근대적 요소가 혼재되었던 그가 살았던 근대기의 특징이기도 한 것이다.
더보기Chae Yong-sin (Pen-name: Seokji) was one of the country's representative portrait painters in early modern times. He served as a military official and had the honor of being assigned the duty of painting the king's portrait. Upon hearing of the signing of the Eulsa Treaty (or Protectorate Treaty) in 1905, by which Japan deprived Korea of its diplomatic rights, he returned home to Jeolla Province, befriended many independence activists, and started producing anti-Japanese works. This paper attempts to shed light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portraits painted by Chae Yong-sin from the perspective of "modernity". The elements of modernity contained in his works can be listed as follows. First, the portraits of King Gojong that he painted show that the king came to be regarded as an object of respect for everyone through a change in the meaning of the royal portrait due to the influence of modernity. Chae spread extract copies of the his portraits of King Gojong in response to the demand for them among ordinary people. Second, he painted women or married couples. Notably, many of his works portray women. It appears that the Confucian tradition of imposing restrictions on the painting of women had vanished, along with the tradition of men and women keeping away from each other. Another noteworthy point is that many of the paintings portray married couples. These facts alone can be associated with the appearance of modernity. By around 1918, he was painting figures from the various social classes. The lifting of the restrictions placed on portraying the social classes in paintings was also a factor of modernity. He also used photographs in painting his portraits. It has been conjectured that for him, photographs were a way of meeting the requirement associated with large quantity orders and enabled him to overcome the difficulty of painting women in connection with the custom of men and women remaining segregated from each other. Finally, an ad leaflet distributed by a business named Chaeseokgang in about 1940 shows that the business produced order-based portraits, publicizing the 90-year-old Chae Yong-sin and providing detailed information on how much he charged according to the forms of the paintings. It states the conditions and obligations of both parties, displaying a very modern, albeit rudimentary, approach to commercial practice. Despite such elements of modernity, the value that dominated his life was a leisurely life. He was an exemplary and patriotic high-ranking official who remained loyal to the king. This was a characteristic behavior of those who lived in an era when traditional values blended with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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