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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제주도 목축업의 위기와 ‘牛馬賊’ 사건 = The Crisis of Livestock Industry in Jeju-do and Umajuk[牛馬賊] in the Early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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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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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68(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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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early Joseon Dynasty, livestock farming was the main industry in Jeju, and livestock culture remained. From the standpoint of the Joseon government, which advocated agronomism, the situation in Jeju Island was unfamiliar. The Joseon government implemented two conflicting policies for Jeju Island. Since horses were still an important means of transportation and Jeju Island was the largest supplier of horses, it was hoped that livestock farming in Jeju Island would be maintained. At the same time, Jeju Island also hoped to be reorganized into an agricultural society.
As agriculture expanded, the livestock industry's position was bound to shrink more than before. In addition, they tried to create new ranches on islands along the mainland because of concerns that the Ming Dynasty might demand Jeju horses. In this process, horses needed for the newly created ranch were also supplied from Jeju. The number was large enough to exceed two thousand. As these policies were implemented, the livestock industry in Jeju Island was shrinking, and as a result, the lives of livestock farmers have become more difficult than before.
As their livelihood became more difficult, they slaughtered horses and sold dried pork and leather produced there to make a living. Horse slaughter was customary and routine in Jeju society, where livestock culture was dominant. However, in order to overcome the difficult livelihood around 1430, the slaughter of horses more than doubled than before, leading to concerns over horse breeding. Accordingly, Sabok-si insisted on strongly punishing horse butchers. Saboksi's argument was accepted and Jeju Island's Umajuk was punished for being forcibly moved to Pyeongan Province.
However, after taking these measures, Sejong found out that some of the horse butchers in Jeju Island included those who customarily slaughtered their horses. He thought the punishment against them was unfair. So they were sent back to Jeju Island to nullify the punishment. However, the ministers objected to Jeju's overpopulation, saying, "Is it necessary to send them back, who are already moving to land and settling down as farmers?" Sejong, who had a great love for the people, did not carry out his argument despite the opposition of many ministers. In this way, many livestock farmers in Jeju Island, not subject to punishment, were unfairly forced to move to Pyeongan area and other places. However, since they were not criminals, I think they have a character similar to refugees in the current sense of having to leave their hometown unfairly due to the government's wrong judgment and policy.
조선 초기 제주도는 목축업 중심이었고 농업은 중시되지 않았다. 농본주의를 내세운 조선 정부 입장에서 그러한 제주도 상황은 낯선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제주도에 대해 상반되는 기대를 갖고 정책을 시행하였다. 우선 말은 여전히 중요한 교통수단이었고 제주도는 최대 말 공급지였으므로, 제주도의 목축업이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제주도를 농업 사회로 재편하고자 했다. 농업 확대는 농지 확보를 전제로 한다. 이를 위해서 목초지 일부가 농지로 바뀌었다. 이는 목축업에 불리한 환경이었다. 또 명나라가 제주 말을 요구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본토 연안의 섬들에서 목장을 신설하였다. 새로 조성된 목장에 필요한 말들은 제주에서 공급되었다. 그 숫자는 2천 마리가 넘었다. 제주 말의 반출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이 시행되면서 제주도 목축업은 위축되었고, 그로 인해 牧子들의 삶도 힘들어졌다.
생계가 더욱 곤란해진 목자들 중 일부는 우마를 도축하여 생산한 건육포와 가죽 등을 판매하여 생계를 도모하였다. 우마 도축은 목축업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제주에서는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일이었다. 그런데 1430년을 전후하여 곤란한 생계를 타개하기 위해서 우마 도축이 이전보다 갑절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말 번식이 우려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에 사복시에서는 말을 도축한 이들을 강력히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주장은 받아들여져서 그들은 ‘우마적’으로 낙인 찍히고 평안도 지방으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세종은 이런 조치를 취한 이후에 제주도의 우마적 중에는 관습적으로 도축한 이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종은 그들에 대한 처벌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강제 이주시킨 그들을 제주도로 돌려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제주가 인구 과잉으로 여러 문제가 있는데, 이미 육지로 이주시켜 농민으로 정착해 가는 그들을 굳이 돌려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반대하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던 세종도 다수 대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지는 않았다. 이렇게 해서 처벌 대상으로 보기 어려운 제주도 목자들이 다소 억울하게 평안도 등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조선 초 제주도의 이른바 ‘우마적’ 사건은 이와 같은 배경과 경과 속에서 전개되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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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 KCI후보 |
2010-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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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86 | 0.86 | 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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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 | 0.64 | 1.22 | 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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