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蓉菴 金炳始(1832~1898)의 삶과 현실인식 = The life and thought of Byeong-Si Kim (1832~1898)
저자
연갑수 (서울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8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발행기관 URL
수록면
103-136(34쪽)
KCI 피인용횟수
4
제공처
소장기관
Byeong-Si Kim (金炳始) was the man who was a descendant of Andong Kim clan, the most influential clan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and went up to the position of the Prime Minister. He was a conservative politician who stood on the critical attitudes against the Enlightenment or Modernization policies after the opening nation to the Westerners. But he had the public reputation of strict integrity.
After the success of the state examination in 1885 (the 6th year of King Cheoljong), he reached on the high ranking position of the Government in the mid 1870'. It was very fast promotion, so there must be the influence of his renowned clan and his own ability of an officer. His decisive moment which gained the confidence of King Gojong was the selection of the private meeting member of the King (Byeol-Ib-Si ; 別入侍) in 1875 (the 12nd year of King Gojong). He devoted his royalty to the King Gojong in the face of the risk of his life at the crisis of the Military Mutiny of 1882 and the Coup d'Etat of 1884.
After the Military Mutiny of 1882, he also made a close relationship with the Qing dynasty's officers which began to intervene in the Joseon dynasty's domestic affairs. What is more he spoke for the situation of Qing dynasty. The reason why he played that role was his trust on the Qing dynasty as the power which maintain the traditional system of Joseon dynasty.
The ideal type of political system, Kim thought, was the officials especially the Prime Minister, had the power of the Government. And the role of a king was selection of good officials and entrusting tasks to them without suspicion. But, Kim thought, actually King Gojong was allured by the western-oriented officials who were very wicked, so King Gojong regulated even minor details. Kim intended the financial affluence by the frugality of government, not by the compulsive increasing of modern industries for the national wealth and strength. He criticized the Enlightenment or Modernization policies, which were currently in progress, wasted the finances without the effective results. The lists which Kim criticized were the new policies, eg. the water transport by steamships, the casting of Equivalent of five cash(Dang-o-jeon ; 當五錢), the silver standard, the raise of a foreign loan from western countries, the recruitment and training of western style troops. There are some documents which revealed the facts that Kim had several conferences with Yuan Shi Kai(袁世凱), who was the head of the Qing's legation, behind the disparaging statements against the Enlightenment policies.
The critical view against the Enlightenment policies, which deduced from the trust on the power and goodwill of Qing dynasty, had to be changed after the Qing's defeat of Sino-Japanese War of 1894. At the same time Kim had the close and secret relationship with King Gojong who resisted to the Japanese intervention. At last Kim proposed a new national code which collected the wisdom of the Enlightenment and the Conservative for overcoming the peril of the Joseon dynasty.
김병시(金炳始;1832~1898)는 조선후기 최고의 명문이었던 안동 김문 출신으로서 영의정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개항기 각종 개화정책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펼친 보수적인 인물이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청렴하고 강직하다는 평판을 들었다. 철종대 과거에 급제한 김병시는 가문의 후광과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대원군 집권기에 이미 고관의 지위에 올랐다. 그가 결정적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 계기는 1875년 별입시로 선발된 것이었다. 김병시 역시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등의 위기 상황에서 고종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헌신하였다.
그런데 김병시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서 정치적 간섭을 강화하여 나가던 청국의 관료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쌓아 나갔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김병시는 조선 조정에서 청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병시가 청국의 입장을 대변한 것은 선왕의 법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지원세력으로써 청국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병시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체제는 대신이 중심이 되어 의정부에서 국정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국왕의 역할은 훌륭한 대신을 선정하여 그에게 임무를 맡기되 의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왕인 고종이 서양이나 서양에 경도된 간사한 신하들에게 현혹되어 국정을 전단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국가의 재정에 대하여도 인위적인 부국강병정책보다는 절검을 통한 재정 지출의 축소를 지향하였다.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하여 당시 추진되었던 각종 개화정책은 실효도 없으면서 재정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화륜선을 이용한 조운, 당오전 발행, 은화 유통, 서양으로부터의 외채 도입, 신식 군대의 양성 등이 모두 김병시가 비판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김병시의 이러한 개화정책 비판의 배후에는 역시 조선의 내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청국의 원세개와의 교감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청국의 국력과 호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개화정책을 비판하였던 김병시의 입장은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패퇴하게 되자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간섭이 강화되는 것에 반발하던 고종과 다시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개화세력과 수구세력들이 서로 지혜를 모아 새로운 국가 법전을 만들자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199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87 | 0.87 | 0.96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97 | 0.98 | 2.253 | 0.44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