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峰庵 邊月周의 生涯와 思想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4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21-169(49쪽)
제공처
소장기관
峰庵邊月周(1909-1975)는 1909년 11월 13일 全南長城郡長城面長安里 33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의 식민치하에서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냈 다. 그의 부친이 3․1독립운동에 가담하여 獄苦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光州高普4학년 때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광주고보에서 퇴학당 하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광주고보에서 퇴학당하고 나서 長城白羊寺에 몸을 의탁해 있다가 1930년(22세) 사미계와 구족계를 받았다. 또한 그는 28세 때인 1936년 白龍 城으로부터 傳法偈를 받았다. 그는 출가 후 陳震應강백으로부터 一代時敎를 배웠다. 그런 다음 禪院에서 십년 이상 수행했다. 그 결과 禪과 敎를 겸비한 宗匠이 되었다. 그 후 그는 비구․대처간의 종권 다툼이 있기 전까지 주로 해인사에 주석 하면서 교화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55년 이후에는 해인사에서 설립한 海印 大學(1961년 馬山大學으로 교명변경)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오직 후학양성 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1975년 2월 4일 진해 대광사에서 入寂했다. 한편 봉암의 사상은 그의 實踐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의 修行觀은 각 자의 根機에 따라 수행법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느 한 가지 수행법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마치 병의 증상에 따라 약을 처방하듯이 근기 에 맞는 수행법을 권장했다. 또한 그는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戒律觀 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의 敎化觀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남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역량을 비축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峰庵의 法統觀은 자기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法統은 臨濟宗法일지라도 宗祖는 太古普 愚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峰庵의 政治觀은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政敎分離의 원칙을 고 수했다. 그는 승려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극히 경계했다. 봉암의 社會觀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며, 이 웃을 위해 四攝法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것을 ‘無相行’이라고 표현했다. 이렇듯 봉암의 일생은 수행과 교화에 전념한 삶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도 수행과 교화의 범주에서 벗 어나지 않았다. 그는 앎과 실천이 일치 했던 근래에 보기 드문 先覺者였다.
더보기Bongam Byeon Wol-ju(峰庵邊月周: 1909-1975) was born at 337 Jangan-ri, Jangseong-myeon, Jangseong-gun, Jeollanam-do on November 13, 1909. He went through hardship in his childhood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because his father languished in jail for his joining the 3.1 Independence Movement. He was also put in prison after being expelled from school for the charge of leading the Gwangju Student Independence Movement when he was a fourth-grade student at Gwangju Advanced Elementary School. Since then, he stayed at Baekyang-sa Temple, Jangseong and received both sāmaṇera-sīla and upasampadā at the age of 22 in 1930. In addition, he received jeonbeop-ge(傳法偈, poetic verses transmitting the truth) from Baek Yong-seong(白龍城) in 1936 when he was 28 years old. After he abandoned secular life, he learned ildaesigyo(一代時敎, all teachings of the Buddha from Instructor Jin Jin-eung(陳震應). And he practiced for over ten years at a meditation hall. As a result, he became a master of both Zen meditation and the doctrinal teaching. He dwelled and preached at Haein-sa Temple until the conflict for the power of the Buddhist Order between bhikkus and married Buddhist monks broke out. After the year of 1955, he devoted himself to teaching disciples as a professor of Haein College(its name was changed into Masan College in 1961) established by Haein-sa Temple. He entered nirvāṇa in Daegwang-sa, Jinhae on February 4, 1975. Bongam's thought can be examined through his view of practice. He insisted that every individual should practice according to their own readiness(根機). He didn't adhere to only one way of practice, but recommended different ways of practice depending on their own readiness as doctors prescribe proper medicine by considering patients' symptom. Furthermore, he thought that sīla-vinaya should be observed. He also emphasized that Buddhist monks must preach according to people's readiness. In order to teach others, monks should build up their capabilities first, he said. Bongam took an unchanging stand for the dhamma tradition as it was related to our identity. And he insisted that even though the dhamma tradition was imjejongbeop(臨濟宗法), the founder should be Taegobowu (太古普愚). He sticked to the principle of the separation of state and church. So, he sternly warned Buddhist monks not to be involved in politics. Bongam's social stance was based on reality. He asserted that we should not be complacent with our enlightenment and should implement the four beneficences(cattāri sangaha-vatthūni, 四攝法) for our neighborhood. He described it as 'musanghaeng(無相行)'. As we have seen, Bongam's life was dedicated to practice and teaching. And his thought didn't diverge from the category of reforming through teaching. He was a rare religious pioneer as his practice was in agreement with his knowledge.
더보기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