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중앙아시아 고려인사회의 정체성과 홍범도 인식(1937~1964) = Korean Society’s Identities and Awareness about Hong Beom-do in Central Asia(1937~1964)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6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60-297(38쪽)
DOI식별코드
제공처
소장기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洪範圖(1868~1943)는 무장투쟁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홍범도를 그 이상의 상징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고려인사회는 1940년대부터 문학작품과 언론을 통해 업적을 기리는 한편, 분묘사업과 거리조성 사업을 벌이면서 홍범도의 상징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인사회의 홍범도 인식은 시기별로 변화했고, 이는 고려인의 민족정체성 변화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연해주 고려인사회는 스탈린 정권이 1929년부터 실시한 전면적 집단화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건설, 토호 숙청, 소수민족정책 변화 등으로 인해 혼란을 겪게 되었다. 더욱이 1931년의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으로 소련 지도부가 일제와의 전쟁위험에 직면하자, 고려인은 일제의 반소침략 근거자로서의 잠재적 가능성에 더욱 주목받게 되었다. 곧 이어 고려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숙청되었고, 고려인은 1937년 ‘적성민족’으로 분류되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었다. 연해주 고려인사회를 둘러싼 1930년대의 격변기 때문에 1920년대 초까지 항일투쟁의 상징이었던 홍범도는 고려인사회에서 잊힌 채 지도자로 부각되지 못했다.
그러나 홍범도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고려인사회에서 독립운동가 이상의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고려인사회도 전쟁에 참가해야 한다는 여론이 부상하면서, 무장투쟁의 ‘전설’인 홍범도가 그들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된 것이다. 고려인사회는 이미 70대 고령이었지만 무산계급 출신으로 일찍이 레닌으로부터 항일빨치산 혁명가로 인정받고 강한 참전 의지를 보인 홍범도를 ‘이상적 소비에트 시민’에 부합한다고 생각했고, 그를 고려인의 상징으로 부각시켰다. 고려인사회가 홍범도를 ‘이상적 소비에트 시민’으로 부각시켰던 것은 ‘적성민족’으로 몰려 훼손당한 민족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후 고려인사회의 민족정체성 운동은 스탈린의 민족정책에 따라 주춤했지만, 스탈린의 사망과 흐루쇼프의 제20차 전당대회 이후 이전보다 더욱 강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려인의 민족 명예회복 운동은 소비에트 체제하에서 고려인의 역할과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고려인사회는 홍범도와 김알렉싼드라를 부각시켰다. 김알렉싼드라는 소비에트 체제 하에서 혁명적 이념에 투철한 고려인의 상징으로 강조되었다. 그리고 홍범도는 투철한 항일의식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고려인으로 부각되었다. 고려인은 이러한 홍범도·김알렉싼드라 인식을 바탕으로 소련의 소수민족정책 변화와 약화되어 가는 젊은 고려인 세대들의 민족정체성에 맞서 고려인사회가 전개한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는 고려인사회의 이주역사 서술과 항일투사 추모 등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고려인사회의 홍범도 인식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추모에 그치지 않고, 중앙아시아 고려인 그 자체를 상징하며 민족정체성 형성과정에서 구심점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었다.
This essay explores how the relations between the change of national identities and the awareness about Hong Beom-do(洪範圖, 1868~1943) in the 1937~1964’s Soviet Korean society. Hong Beom-do is mostly considered as a symbolic men of Korean’s armed struggle against Japanese Empire in the Korean academic world. However, in the Central Asia’s Korean society, he is evaluated as a more symbolic men than an anti-Japanese Empire activist. Because they are admiring his work since 1940’s through activities, such as literary work, a grave development project and so on. These Hong Beom-do’s awareness of Soviet’s Koreans were seasonally changed and intertwine with a changing process of their national identities.
When Stalin’s Great Purge was started, Soviet’s Koreans were confused for reason of problems, such as the drastic full-scale collectivization, purge to kulak and Korean communist leaders. Because of these circumstances, Hong Beom-do was not the spotlight in the 1930’s Soviet Korean society.
However, when the German–Soviet war broke out, Hong Beom-do emerged as a ‘ideal Soviet citizen’ and ‘symbol of Soviet Korean’. Because Soviet Koreans thought that Hong Beom-do is ‘ideal Soviet citizen’. He was the first Korean communist revolutionist who was recognized from Lenin. Moreover, During the German–Soviet war period, he showed will the fight. Because of these things, Soviet Koreans thought him as an ‘ideal Soviet citizen’ and ‘symbol of Soviet Korean’. And Soviet Korean society staged restoration movement of national identity using Hong Beom-do’s awareness.
Soviet Korean’s restoration movement of national identity was transformed to movement of national identity after the 20th Congress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After these congress, Soviet Korean society started to emphasize two Koreans, Kim Alanxandra and Hong Beom-do. Kim Alanxandra emerged as a ‘revolution’ and symbol of Soviet Korean. On the other hand, Hong Beom-do was emphasized as a symbol of ‘anti-Japanese Empire’ and Soivet Korean.
And furthermore, Soviet Korean started to stage movement of national identity, which was based on Kim Alanxandra and Hong Beom-do’s awareness, by describing the their own’s history and protecting native language.
To sum up, Hong Beom-do represented Soviet Korean itself in the Soviet central asia since 1941. These Hong Beom-do’s awareness of Soviet Korean society served as the impetus for Soviet Korean’s movement of national identity in the 1980’s Perestroika period.
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