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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30년대 유재기의 농촌운동과 기독교사회사상 = Agricultural Movement and Christian Social Thought of Yoo Jae-ki in the 1920~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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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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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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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07(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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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dissertation looks into Jae-ki Yoo’s agricultural movement and Christian Social Thought in the 1920~30’s. His experience in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his youth influenced the formation of his national consciousness greatly, and his father’s conversion into Christianity gave him the opportunity to accept Christianity himself. His school life in Daegu and rural evangelism tour became the foundation to having critical mind about the miserable national situation..
With a friend’s help, Jae-ki Yoo studied abroad in Japan and came to accept Christian socialism through works of Kagawa Toyohiko, a Christian socialist, and Sugiyama Motojiro. He came to understand the ideological direction and methods of Christian socialist idea. After returning, he got into Agricultural Institute of Pyongyang Soong-Sil. He also got into Pyongyang Seminary and started his pastoral career. When he was studying in Pyongyang, he met Cho Man-sik and Bae Min-soo, and took a leading role as a leadership officer in “Christian Agricultural Research,” established in 1929.
After the Great Depression, in 1933 when Bae Min-soo was elected as the chief of Presbyterian agricultural division, Yoo Jae-ki used his extensive knowledge and experience in cooperative association to lead the Presbyterian agricultural movement. After establishing the ideology based on Christian socialism which is based on Jesus’s Love, he stressed the need for cooperative association. He asserted that cooperative association eliminates the evils of capitalism’s contradictions and that the objective is to realize life of Love through independent economic relationship, and emphasized that it is the beginning of heaven-bound movement that Christian community strives.
However, at the end of 1930s when Japan's militarism arose and began opression, Christian socialist movement fell into stagnation. Presbyterian agricultural movement also slowed down. Within the Presbyterian church, argument of agricultural movement’s uselessness arose. During this turmoil, Yoo Jae-ki had to suffer great hardship from ‘Farmers Association incident’which was oppressed by Japanese imperialism. After his release, he took the position of the senior pastor in the biggest church in Daegu. He later on was elected to serve in Daegu’s regional government-patronized organization. This eventually left a mark of shadow over his career.
이 논문은 1920~30년대 유재기의 농촌운동과 기독교사회사상을 살펴본 연구이다. 청소년시절의 3ㆍ1운동 경험은 그의 민족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고, 아버지의 기독교 개종은 그가 기독교를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대구 학창시절과 농촌 순회전도활동은 비참한 민족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유학을 간 유재기는 기독교사회주의자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와 스기야마 모토지로(杉山元治郞)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그는 기독교 사회사상의 이념적 지향과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귀국한 뒤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 농과강습소에 입학하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로서의 활동도 시작하였다. 평양 공부시절 그는 조만식과 배민수를 만났고, 1929년 결성된 ‘기독교농촌연구회’에서는 지도부 임원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세계대공황 이후 1933년 장로교 농촌부 총무에 배민수가 선임되었을 때, 협동조합에 관한 해박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유재기는 장로교농촌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예수의 애 사상에 기초하는 기독교사회주의를 이념적으로 확립한 그는 협동조합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협동조합운동이 자본주의 모순의 폐해를 제거하며 자립적 경제관계를 통해 애의 생활을 실현시키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하고, 기독교 공동체가 지향하는 천국운동의 출발점임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말 일제의 군국주의가 대두하며 탄압을 자행하자, 기독교사회운동이 침체에 빠져 들었다. 장로교 농촌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장로교 안에서도 농촌운동 무용론이 대두하였다. 유재기는 이런 혼란 속에서 일제의 탄압을 받은 ‘농우회 사건’으로 큰 고초를 겪어야 했다. 석방된 뒤 그는 대구지역에서 가장 큰 대구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이어 노회장에서 선임되어 대구지역 어용단체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그의 이력에 어두운 흔적을 남기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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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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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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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81 | 0.81 | 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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