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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 총회(1618-1619) 직전 시대의 네덜란드 교회와 국가 관계의 배경 연구 = The Church and State of the Netherlands before the Synod of Dort(16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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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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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중심 사상인 은총의 신학이 신학적으로 정리되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것은 도르트 총회(Synod of Dort, 1618-19)였다. 그 배후에는 네덜란드가 스페인에서 독립하는 역사적 과정이 맞물려 있었다. 그러므로 도르트 총회는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이면서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의 문제이기도 했다.
네덜란드는 합스부르그의 지배 밑에서 유연한 연합되어 있었던 지역이었는데 1566년 성상파괴운동과 1568년 독립 전쟁 발발 이후 칼빈주의 신앙과 국가의 독립 의식이 맞물리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파와 호마루스파의 신학적 차이는 동시에 그들의 교회와 국가관에도 드러났다. 이 두 신학적 경향은 모두 다른 사상과 종교를 가졌다고 해도 국가로부터 조사와 박해를 받을 수 없고 신앙의 자유를 갖는다는 1579년의 우트레크트 연합(Utrecht Union)의 정신 위에 서 있었다. 이 우트레크트 조약은 당시의 개신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던 역사적 상황에서 보면 매우 의미있는 신앙의 자유 사상으로서 네덜란드 7개주 연합 공화국(1588)의 모체가 되었다. 이 우트레크트 연합은 또한 스페인 군대들의 안트베르펜 폭동사건 (de Spaanse Furie, 1576) 이후 형성된 헨트 평화회의(De Pacificatie van Gent, 1576)의 사상 위에 정초 되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파와 호미루스파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항쟁파인 아르미니우스파는 자신의 자유로운 신앙을 국가의 통제 밑에 넣고자 하는 에라스투스주의 즉 국가교회주의적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스페인과의 무역의 활성화를 도모했으며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주 정부가 관할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홀란드의 행정장관인 올덴바르너펠트(Oldenbarnevelt, 1547-1619)와 같은 노선이었다.
그러나 호미루스 중심의 반항쟁파는 교회와 국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하에 있으며, 교회와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 교회는 국가로부터 자유하며 독립적이라는 정통적인 칼빈주의의 노선을 따랐다. 스페인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이었으며,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일치성을 중요시 했고 지방 분권보다는 정치적 중앙집권화를 바랐다. 같은 맥락에서 이들은 네덜란드 국가 안에서 발생하는 신학적 문제에 대해서도 전국주의적이었다. 이후의 네덜란드 역사는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때까지 교회는 국가에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동시에 국가와 함께 파트너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In the center of the Reformational thoughts, the theology of the grace was internationally authorized in the Synod of Dort(1618-19). In the backgrounds of that process we see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Netherlands from Spain. The Synod of Dort(1618-19) has thus the meaning in the perspective of the issue of Church and State, as well as that of the Reformed theology.
The Netherlands was a region of the flexibly united provinces under the rule of the Habsburgs. Since the iconoclasical move-ment(1566) and the outbreak of the independent war(1568), the faith of the Calvinism and the will of the national independence were closely engaged. Basically the Arminians and the Gomarists stood on the idea of the Union of Utrecht(1579), which proclaimed the protection of the human rights not to be examined by the state for the religious differences and to have a religious freedom. The principle of the Union of Utrecht showed a special implication in terms of the tolerance of thoughts, when we consider the circumstances of the persecution of the Protestants in those days. The Union of Utrecht became the parent tree of the Republic of the Seven United Netherlands (Republiek der Zeven Verenigde Nederlanden). In the base of the Union of Utrecht we finds the idea of the Pacification of Gent(1576) which was formed just after the Spanish Fury(Spaanse Furie, 1576).
The theological differences between the Arminians and the Gomarists were also revealed in their distinct viewpoints to Church and State. The Remonstrants illustrated the Erastian thought, so that they tried to bring their ecclesiastical issues under the control of the state of the province. The Remonstrants, economically, aimed to revitalize the trades with the Spain, and they accepted the supremacy of the state of the province to the theological matters. In this sense they followed the political line with Oldenbarnevelt(1547-1619), who was a state man of the province of Holland and supported the religious tolerance.
On the other hand, the Gomarists strongly believed that both state and Church should be controlled by the Word of God. They followed the orthodox Calvinism which emphasizes the freedom and independence of the Church from the State in the ecclesiastical and theological issues. The Gomarists held strong position against Spain and they put the emphasis on the unity of the doctrine. Thus, they wanted to have a centralized power rather than the decentralized one. In the same context, the Gomarists tried to solve the theological issue which was presented by the Remonstrants in the national syn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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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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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2-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9-04-17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미등록 -> Korea Reformed Theology Society | KCI등재 |
201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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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29 | 0.29 | 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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