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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의 역사적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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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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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신라 말의 혼란 속에서 단순히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회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그는 민심의 수습과 호족세력의 통합에 성공하여 후백제를 건국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후삼국통일과 고구려의 옛 영토 수복을 꿈꾸었다.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의 모델이 되었다. 견훤의 후삼국통일과 고구려 구토 회복의 꿈은 왕건의 고구려 계승과 西京중시 등 북방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그에 맞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수립하였다. 그 하나가 백제계승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미륵신앙을 통한 이상 사회의 실현이었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현실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민심을 끌어들이는 정치이념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당시 호남지역 주민의 정서에 맞는 새로운 정치이념이었다.
견훤은 외교에도 민첩하였다. 대외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상황에 따라 명분과 실리를 추구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관계를 실현하였다. 그리하여 새로운 국제질서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등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여러 가지 한계도 있었다. 견훤은 우선 구체제를 극복하는데 실패하였다. 그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견훤의 역사인식의 이중성에 있었다. 자신이 백제계승자로서 백제부흥과 삼한 통합을 내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 왕실에 대한 ‘尊王의 義’를 강조하였다. 견훤은 자신의 출생설화를 통해 백제 계승자임을 정당화하면서도, 반면에 자신의 先代를 신라 왕실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즉 자신의 계보를 진흥왕의 5대 손으로 신라왕족의 직계 후손에 연결시킨 것은 백제계승자임을 표방했던 정치이념과는 이율배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견훤의 역사인식의 이중성은 신라와의 대외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즉 견훤은 한편으로는 후백제왕을 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군신임을 자임하고 있었다.
견훤은 미륵신앙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과 결합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지만, 호족세력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는 자신의 초기 세력기반인 광주 호족과 천도 후 등장한 전주 호족 간의 대립을 막지 못하였다. 특히 나주를 비롯한 서남해 일대의 해상세력이 견훤에게 등을 돌린 것은 후백제 성장의 결정적 약점이었다.
후백제의 한계는 對중국?일본외교에서도 나타난다. 후백제는 吳越과 後唐과의 외교에 앞장서서 후삼국 중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들로부터 받은 직함에는 ‘百濟王’과 함께 ‘신라서면도통’이라는 명칭이 함께 나온다. 일본과의 외교에서도 비슷하였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후백제 사신을 ‘新羅人’이라고 하였고, 견훤을 가리켜 ‘新羅 陪臣’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일본에서는 후백제를 독립된 국가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후백제의 관부나 관직 등의 내용에서도 그 성격 및 한계를 찾을 수 있다. 즉 후백제는 백제의 정치제도를 계승하지 않고 오히려 신라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하였다. 후고구려가 독자적인 행정체계를 갖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후백제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Gyeonhweon did not stop at simply revolting in the midst of a chaos at the end of Silla Dynasty, but came up with a goal of constructing new society. Successfully settling the public and combining the powerful clans, he found Hubaekje (Later Baekje), and furthermore dreamed of the unification of Later Three Kingdoms and recovery of old territory of Goguryeo.
Gyeonhweon’s foundation of Hubaekje became the model of the foundation of Hugoguryeo (Later Goguryeo) by Gung Ye. Gyeonhweon’s unification of Later Three Kingdoms and recovery of Goguryeo territory influenced the Nothern Policy, such as Wang Geon’s succession to the throne and emphasis on Seogyeong.
Gyeonhweon, who established Hubaekje, established a new ideology accordingly. One of them was the consciousness of Baekje succession, and the other was realization of ideal society through Maitreya faith. These two had the indivisible relationship, and acted as the political belief to draw discontent public. It was a new political concept that suited especially the residents of Honam area at the time.
Gyeonhweon was quick in diplomacy also. He acknowledged the importance of international relations, and realized active international relationships such as seeking justification and benefit based on the situation. Therefore, he played a leading role by rapidly responding to the new international order. However, Hubaekje had many limitations also. First, Gyeonhweon failed in overcoming the old system. One of the important reasons lied within the dualism on Gyeonhweon’s historical recognition. While he claimed Baekje’s revival and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as a successor of Baekje, on the other hand, he emphasized the ‘rightness of honoring the King’ towards the Royal Family of Silla. Gyeonhweon justified his position as Baekje successor through his birth story, but on the other hand, tried to connect his ancestors to the Royal Family of Silla. In other words, connecting his pedigree directly to 5th generation descent of Silla Royal Family is contradictory to his political ideology that claimed he was the successor of Baekje. The dualism of Gyeonhweon’s historical recognition shows in the international relations with Silla. That is, while he called himself the King of Hubaekje, he was posing as the ruler and the ruled of Silla.
Gyeonhweon was somewhat successful in settling the public and uniting with the powerful clans, but failed in resolving the conflicts among the clams. He could not prevent conflict between his initial power base, Gwangju Clan, and Jeonju Clan, which appeared after moving the capital. Especially, the southwestern seashore clans, including Naju, turning their backs on Gyeonhweon were a crucial disadvantage in the growth of Hubaekje. Limitations of Hubaekje also appear in the diplomatic relations with China and Japan. Hubaekje held a prominent position among the Later Three Kingdoms by leading the diplomacy withWuyue and Later Tang, but the title received from them includes ‘King of Baekje’ along with ‘Southern Silla Military Governor’. It was similar in the diplomacy with Japan. According to Japan’s record, Hubaekje ambassador was called ‘person of Silla’, and Gyeonhweon was described as ‘retainer of feudal lord of Silla’. This proves that Japan at the time did not recognize Hubaekje as an independent country.
Information on Hubaekje’s government or office positions shows its nature and limitations. Rather than inheriting Baekje’s political system, Hubaekje borrowed that of Silla. Comparing with Hugoguryeo’s independent administration more clearly shows Hubaekje’s characteristics.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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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7-07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The Korean Ancient Historical Association -> The Society for Ancient Korean History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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