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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남양향교의 운영과 지역사회에서의 위상 = The management of Namyang-Hyanggyo(南陽鄕校) in the 19th century and its social status in the local community
저자
김자운 (공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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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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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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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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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12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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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oron of Youngnam may largely be classified in two type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management of Namyang-Hyanggyo in the 19th century and to examine its status in the local community. First, the history of Namyang-Hyanggyo was briefly reviewed. Second, the state of management of Namyang Hyanggyo in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reviewed in terms of the transfer process of Namyang Hyanggyo in the 19th century, the loss and recovery of Hyanggyo-owned land, and the disturbance and reorganization of the Cheonggeumrok(靑衿錄). Third, I reviewed how the gentry and commoners used Hyanggyo to secure their presence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examined the social status and role of Namyang-hyanggyo in the local community.
Hyanggyo in the late Joseon Dynasty is often described as a devastated state that has barely retained the function of sacrifice while losing its educational function. However, contrary to this prejudice, when the buildings of Namyang-Hyanggyo were transferred in the 19th century, the gentry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process, voluntarily contributing more than 60% of its resources. It can be confirmed that this was a great scale compared with the cases of Jiksan-Hyanggyo or Jinju-Hyanggyo in the same period.
Also, the scholarship which was supposed to be paid from the state was not properly paid to Namyang-Hyanggyo in the late Joseon Dynasty. So they bought the land on their own and used it as working capital. In the 19th century, they lost part of the land due to poor management, but in the late 19th century, Namyang-vice found ways to restore the lost land and to enact regulations to thoroughly manage it. According to the regulations, Nanyang-Hyanggyo in the 19th century served not only as a function of sacrifice but also as a base for various village activities of the local leaders.
On the other hand, the disturbance of Cheonggeumrok(靑衿錄) since the 18th century shows the growth of the common people who were trying to raise their status based on the economic power at that time. And this fact was gradually threatening the status of the gentry in Namyang-Hyanggyo. Nevertheless, the gentry remained in Hyanggyo until the end, reorganizing Cheonggeumrok(靑衿錄), and monopolizing Hyanggyo, because Namyang-Hyanggyo was the last place in the community to maintain and exercise its status as the gentry. Especially, in the late 19th century, both Angok-Seowon(安谷書院) which was the only Seowon in Namyang and Yongbaeksa(龍栢祠) were defeated by Daewon-gun's Seowon abolition. Therefore, Namyang-hyanggyo's social status as a center of local culture had to be strengthened.
이 연구는 현존하는 고문서 자료들을 토대로 19세기 남양향교의 운영 실상을 분석하고 당시 지역사회 내에서 남양향교의 위상을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첫째, 남양향교의 역사를 간략히 검토하고, 둘째, 조선후기 남양향교의 운영상을 19세기 남양향교의 이건 과정, 향교 전답의 유실과 회복, 청금록의 문란과 재정비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마지막으로 19세기 남양향교의 운영에 양반과 평민이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들 각 계층은 향촌에서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향교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는지 검토함으로써 조선후기 지역사회 내에서 남양향교의 사회적 위상과 역할에 대해 해석하였다.
조선후기 향교는 흔히 교육기능을 상실하고 군역을 면제받기 위한 피역소로 전락한 채 간신히 제향활동만을 유지해온 황폐화된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과 달리, 19세기 남양향교는 향교 이건 시 재원의 60% 이상을 양반 유생들의 자발적 기부금으로 확보할 만큼 향교 운영에 유생들의 참여가 매우 활발하였다. 이는 같은 시기 직산향교나 진주향교의 사례와 비교해볼 때 대단한 규모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 남양향교는 언제부터인가 국가에서 지급했던 學田이 제대로 획정되지 않아 재정 기반이 사라지자, 향교 자체 내에서 인근의 전답을 마련하여 운영 자금으로 활용하였다. 향교의 재정난과 관리의 부실로 19세기에는 그 일부가 유실되었으나 19세기 후반 지방관과 교임들의 노력으로 유실된 토지를 되찾고 이를 철저히 관리하기 위한 절목을 마련함으로써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 때 작성한 절목과 1884년 향교 유생들이 작성한 완의의 내용에 따르면, 19세기 남양향교는 단지 제향 활동 뿐 아니라 疏廳으로 활용되는 등 지역 유생들의 향론 집결지이자 다양한 향촌활동의 근거지로서 기능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18세기 이래로 나타나기 시작한 청금록의 혼입은 당시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상승을 도모했던 남양지역 평민층의 성장과 함께 향교 내 양반유생들의 지위가 점차 위협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교유생들이 명분과 교화를 앞세우며 끝까지 향교에 남아 모칭유학들을 찾아 삭적하고 청금록을 재정비하며 향교를 독점하고자 한 것은 남양향교가 양반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행사할 수 있는 지역사회 내에서의 마지막 활동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19세기 후반에는 남양 지역의 유일한 서원이었던 안곡서원과 사우 용백사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된 상태에서 지역문화의 중심지로서 남양향교의 위상은 이전보다 한층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4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KCI등재 |
2019-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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