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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별제의 안과 밖 - 1910년 이전의 논개제를 중심으로 - = Inside and outside of Uiambyeolje -Focusing on Nongaeje before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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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음악사학보(Journal of the Society for Korean Historico-Music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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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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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524(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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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별제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기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한 제사이다. 기녀들이 제관으로 참여하여 악가무가 곁들여진 풍류제례로서, 전근대사회에서 여성의 첫 유교식 제례라는 특징을 갖는다. 매년 제사 때만 되면 진주의 촉성루와 남강 일대에 수많은 인파가 참여할 정도로 지역 축제의 모습을 잘 간직해 왔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 크다. 하지만, 지금까지 의암별제를 비롯해 논개제 전반에 대한 형성과 변천에 대한 규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글은 임진왜란 이후 1910년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약 300년간 논개제의 실체를 조명한 것이다.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논개의 사당인 의기사가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1832년(순조 32)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의기사는 1740년(영조 16)에 세운 것으로 이해해 왔다. 둘째, 의암별제를 처음 실시한 것은 1864년(고종 1) 경상우병사 이교준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의암별제는 1868년(고종 5) 목사 정현석에 의해 처음 시행된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셋째, 논개제는 1593년 진주성 함락 후 민간의 강변제사로 시작된 뒤, 19세기 초반 의기사가 건립되면서 춘추제 형태의 국가제사로 정례화되었다. 그러다가 1864년(고종 1) 6월 함성제 전에 의암별제가 설행되기 시작하였다.
넷째, 일제감점기 이전까지 설행된 논개제는 의기사에서 춘추로 지내는 의기제, 6월 초 길일에 기녀들이 촉석루에서 지내는 의암별제, 그리고 6월29일진무청이 주관하는 함성제 등 3가지이다. 특히 의암별제는 촉석루에서 진주성이 함락된 그 날의 아픔을 떠올리며 논개의 충의를 재기억함으로써 지역민의 충의를 함께 다짐하는 자리였다. 그런 점에서 의암별제는 춘추제에 짝하는 별제의 성격을 띠기도 하지만, 6월 함성제에 앞서 행하는 별제의 의미를 강하게 갖는다.
결국 일제강점기 이전까지의 논개제는 순절한 논개의 충의 정신을 추모함으로써 인심을 수습하고 관민화합을 도모하는 관변 축제의 성격이 짙다. 그 가운데 의암별제는 특히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논개의 충성과 의리를 지역민에게 재기억시키는 기억의 정치학을 통해 향촌사회를 안정화시키는 핵심 기제로 작동하였다.
Uiambyeolje is a ritual to commemorate the soul of Nongae, who passed away during the Imjin War. It is a Pungryu ritual where a prostitute participates as a canon and is accompanied by bad dance, and is characterized as the first Confucian ritual for women in the pre-modern society. It is also significant that the local festivals have been well preserved so that a large number of people participate in the Chokseongru and Namgang areas of Jinju at the time of annual rituals. However, until now, little has been done on the formation and transition of Uiambyulje and Nongaeje in general. This article highlights the reality of Nongaeje for about 300 years after the Imjin War and before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1910. Briefly summarized as follows.
First, Uigisa, the shrine of Nongae, was first established in 1832 (Soonjo 32). Until now, however, it has been understood that the medicinal temple was founded in 1740 (Yongjo 16). Second, it was Gyo-jun Lee, a Commander of Gyeongsang-Udo Army in 1864 (Gojong 1) that first implemented Uiambyulje. Until now, however, it has been understood that the Uiambyeolje was first implemented by Regional Officer Hyeon-seok Jeong in 1868 (Gojong 5).
Third, Nongaeje began as a private riverbyeon ritual after the fall of Jinjuseong Fortress in 1593, and then it became a regular national rite in the form of a spring and autumn festival with the establishment of a medicinal rite in the early 19th century. In June 1864 (Gojong 1), Uiambyulje began to be held before Hamseongje. Fourth, there are three types of Nongaeje, which were held before the Japanese imprisonment period: Uigije, which is held from Uigisa to spring and fall, Uiambyulje, where prostitutes spend at Chokseokru in early June, and Hamseongje organized by Jinmucheong on June 29.
In particular, Uiam Byeolje was a place to pledge the loyalty of the local people together by recalling the pain of the day Jinjuseong fell in Chokseokru and remembering the loyalty of Nongae. In this respect, Uiam Byeolje has the characteristics of Byeolje, which is matched with the Spring Festival, but it has a strong meaning of Byeolje, which is performed before Hamseongje in June.
In the end, the Nongaeje Festival until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s characterized by a spectator festival that promotes public-private harmony by commemorating Nongae's pure spirit of loyalty. Among them, Uiambyulje served as a key mechanism for stabilizing the township society through the politics of memory, which re-memorizes the loyalty and loyalty of Nongae to local people during the dissolution of feudal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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