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片康烈의 국권회복운동과 의열투쟁 = National Rights Recovery Movement and Heroic Struggle of Pyun Kangryul
저자
박경 (서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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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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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5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45-90(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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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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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 Kangryul joine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1907 at the age of 16, starting with the Righteous Army led by Lee Kangnyun. He returned home when he was injured in the Yangju Battle in Gyeonggi Province, and judging that it would be difficult to regain sovereignty only by the struggle of righteous armies, he entered Soongsil School in order to participate in the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which was being actively promoted in the provinces such as Pyeongan and Hwanghae, and he extended his activities by joining Shinminhoe. However, soon after he joined Shinminhoe, he was embroiled in the Korean Conspiracy Case which was in fact fabricated by the Imperial Japan and was put into prison.
Pyun Kangryul took this case as a momentum to fortify his strong commitment to the Korean independence, and started a preparation for a new independence movement. Once out of Seodaemun Prison in 1914, he went to his ancestral home of Gimcheon in North Gyeongsang Province to prepare for an armed struggle and was actively involved with Daehan Kwangbokhoe which had been organized in 1915 in the city of Daegu. In 1918, he went back to his hometown to lead the March 1st Movement in Yeonbaek, Hwanghae Province.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he joined a secret armed organization called Jubidan in Hwanghae Province, which was controlled by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based in Shanghai, and he led the armed struggle as the representative of Anak Gun. But he was once again detained in Haeju Prison in 1920 for one year and two months on charges of hiding Tongnip Shinmun, the mouthpiece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nd collecting war funds.
When he was out of jail in January 1922, Pyun Kangryul went to Manchuria as an exile in November 1922 in order to take part in the Korean National Representatives’ Meeting in Shanghai. However, the meeting did not happen and being disappointed by the breakdown of the meeting, Pyun organized Uisungdan in Shanhaiguan in July 1923 with the aim of Heroic Struggle.
Uisungdan fought against the Japanese and proJapanese Koreans with strenuous activities such as collecting war funds and attacking Japanese government offices, centering Middle Manchuria including Jilin and Changchun. It expanded its forces by establishing an organization networking with other provinces, and at the same time tried to sneak into Korea preparing activities such as the bomb explosion case.
In addition, Pyun Kangryul made a variety of efforts to improve the living standard of the peasant Koreans who were living in difficulties in Middle Manchuria, while being actively involved in the integration of independence movement organizations in the whole area of Manchuria with Yang Kitak who was the adviser of Uisungdan, and also he greatly influenced the organization of Jeongeuibu.
Pyun Kangryul was arrested in Harbin in July 1924 after a tipoff from a spy who infiltrated Uisungdan as a member. He went through a legal battle for six months, but was eventually sentenced to seven years in prison. He was put in solitary confinement and was serving time in Shinuiju Prison when his health deteriorated and was bailed out in April 1927. However, his health did not get better and he died for his country at a young age of 38, ending his involvement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of 20 years which had started in 1907.
본고는 독립운동가 片康烈의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과 중만주지역에서의 의열투쟁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892년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편강렬은 1907년 16세의 나이에 李康秊부대에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08년 경기도 양주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의병활동으로는 국권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당시 서북지방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던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숭실학교에 입학했으며, 新民會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러나 신민회에 가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에 의해 조작된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즉,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게 된다.
편강렬은 105인 사건 연루를 계기로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다지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의 독립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1914년에 출옥한 그는 선대의 고향인 경상북도 김천으로 내려가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大韓光復會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8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황해도 연백군의 3ㆍ1운동을 주도했다. 3ㆍ1운동 이후에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비밀군사조직인 黃海道籌備團에 참여해 안악군의 대표를 맡아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0년 상해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은닉하고 군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1년 2개월간 해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1922년 1월 출옥한 편강렬은 국외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의열투쟁을 목표로 1923년 7월 義成團을 조직하고 길림, 장춘, 카륜 등 중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의성단의 주 활동은 일본인과 친일한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일본관공서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지방조직과 연락기관을 설치하여 세력을 넓히는 동시에 국내로의 잠입을 시도했고 폭탄사건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편강렬은 중만주지역에 거주하는 이주한인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전개했으며, 양기탁과 함께 전 만주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활발히 활동했다. 그 결과 1925년 남만주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인 正義府가 조직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편강렬은 1924년 7월 의성단에 잠입한 밀정의 밀고로 하얼빈에서 체포되었다. 6개월 간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결국 7년형을 받게 되었다. 신의주형무소 독방에서 복역하던 그는 지병이 악화되어 1927년 4월 보석으로 출옥했으나 병세가 나아지지 않아 1929년 1월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편강렬은 그동안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도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편강렬은 16살의 어린 나이에 의병에 가담하여 38살에 순국하기까지 한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20여년의 그의 독립운동을 돌아보았을 때, 편강렬은 의병활동,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 의열투쟁,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 등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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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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