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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초(統一初) 신라(新羅)-일본(日本) 교류와 ‘東萊斷層’路 = Silla-Japan Diplomacy and Dongnae Fault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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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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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자 수취에 있어 수로 운반의 효율성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신라는 울산항을 주로 이용했다. 하지만 대일교섭에 있어서는 부산항을 이용했다.
통일 후 구백제 지역은 그야말로 왕실ㆍ진골귀족ㆍ大寺刹의 재산이 집중된 곳이다.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면서 획득된 이 지역은 신라지배층들에게 재분배되었다. 그 곳에서 생산된 잉여물의 상당량은 서해→남해→동해를 통해 울산항에 하역되어 왕경으로 운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서남해안에서 동해안으로 들어서는 항로가 쉽지 않다고 해도 수도가 가까운 곳에 있는 울산항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화물운송과는 달리 國書나 고가의 물품을 소지한 양국사절의 항해에는 안전이 우선시 되었고, 부산항이 이용되었다. 이유가 있었다. 첫째 對馬島가 일본의 출입국 창구였다. 다음으로 남쪽에서 東北北 방향으로 흐르는 동안난류의 방향 때문에 울산에서 對馬島로 향하는 항해는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부산과 對馬島 사이의 항로는 안정적이었다. 조선 초 對馬島에 개방한 삼포(乃而浦[진해 熊川]ㆍ釜山浦[부산]ㆍ鹽浦[울산]) 가운데 倭船의 부산포 편중은 심각했다. 조선정부는 三浦分泊 준수를 對馬島에 강력히 요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對馬島와 부산 사이의 항로가 그만큼 접근성이 놓았던 것이다.
전성기 금관가야의 김해가 국제무역항이 아니라 외항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부산 다대포(多多羅)였다. 未斯欣 탈출 후 왜군이 신라의 양산을 공격하기 전 먼저 상륙한 蹈鞴(津)을 일본말로 읽으면 타타라(鐵)노츠(津)이고 그것은 多多羅와 음이 통한다. 그곳은 금관가야가 일본열도로 철을 수출하던 浦口였다. 김해의 금관가야도 부산에 외항을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843년 對馬島 북쪽 해안을 지키던 일본 防人들이 저녁에 부산방향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목격했다. 그것은 남해안에서 동해안(울산)으로 북상하는 신라 배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한 烽火였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 직후에 신라와 일본 사이의 교류가 한창일 때 그 불빛은 對馬島에서 부산으로 오는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국의 활발한 교섭의 계기는 이러했다. 672년 羅唐戰爭이 한창이던 때 일본에서 내란(壬申亂)이 일어났다. 天智계가 밀려나고, 天武가 정권을 잡았다. 신라에 대해 적대적인 백제인들을 주변에 두고 있던 天智의 아들 大友皇子가 제거되었다. 등 뒤에 있는 일본열도의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신라에게 도래했다. 그해 11월 신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天武의 신정권을 인정했다.
673년 5월 15일 天武의 즉위를 축하하는 신라의 사절단이 일본으로 향했고, 675년 2月 新羅 文武王은 王子 忠元을 天武에게 파견하였다. 忠元은 4개월 간 奈良의 飛鳥에 머물렀고, 天武天皇을 만난 자리에서 성대한 외교적 儀禮를 행했다.
당시 신라와 일본의 이해는 일치했다. 唐과 전쟁 중인 신라는 등 뒤 일본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려고 했고, 일본은 신라가 唐이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는 방파제가 되어주길 원했다. 683년 忠元이 東萊斷層(부산 동래→울산→王京)을 따라 북상한 기록이『삼국유사』에 보인다. 여기서 부산에 입항한 일본사절의 王京으로의 移動路程이 드러난다. 부산항에 내려 북상하면서 일본 사절이 첫 번째 들린 곳은 東萊溫泉이고, 여기서 자고 다시 출발한 그들은 노포동을 경유하여 울산 靈鷲寺에서 하루를 묵고, 王京으로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靈鷲寺址에 대한 발굴이 행해졌다. 울산박물관은 5개년계획으로 발굴조사를 시행해, 2016년 12월 23일 완료하여 가람의 전모가 드러나 영축사의 사역 규모가 경주 感恩寺와 거의 동급임이 밝혀졌다. 무엇보다 講堂址와 그것을 둘러싼 주거공간으로 보이는 다수 건물터들을 확인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1~3차 조사에서 강당지 동편의 방 구조 건물지가 확인되어 승방으로 추정했는데, 서편과 북편에서도 중복이 심한 다수의 건물지가 발견됐다.
필자는 靈鷲寺의 주거공간들은 入京하는 일본사절들의 숙박시설을 겸했다고 보고 싶다. 703년의 入京한 일본사절의 규모는 204명에 달했다. 울산이 신라 왕경의 물류항구였다면 통일초 부산은 일본과 교섭하는 외교의 항구였다.
Shilla, which was unable to give up the efficiency of waterway transportation in receiving supplies, mainly used Ulsan Port. Unlike freight transportation, the envoy made safety a priority and used Busan Port. There was a reason. First, Tsushima Island was the immigration window of Japan. It was difficult to sail from Ulsan to Tsushima Island due to the direction of the Kurushio Current flowing from the south to the north. However, the route between Busan and Tsushima Island was stable.
There was a separate port in Geumgwan Gaya. It was a Tatara(多多羅:다대포) port in Busan.
In 843 Japanese Soldier guarding the northern coast of Tsushima Island witnessed a sparkling light toward Busan in the evening.
The lighthouse is thought to have served as a guide for ships from Tsushima Island to Busan when the relationship between Silla and Japan was good. There was a reason for active exchanges between the two countries at that time. In 672, the interests of Silla and Japan matched. Silla, which was at war with Tang China, tried to eliminate uncertainty in Japan. Japan wanted Silla to be a breakwater to stop the expansion of Tang China.
The first stop by the Japanese envoy who arrived at Busan Port was Dongnae Hot Spring, and they took a rest here and stayed for a day at the Ryeongch temple in Ulsan, and headed to Silla Capital.
In 2011, excavation of the Yeongchwi temple was carried out. There were traces of many buildings that appeared to be residential spaces. I would like to see the temple as a hotel facility for Japanese envoys. In 703, 204 Japanese envoys entered Silla. If Ulsan was a port of supplies for the Silla Kingdom, Busan was a port of diplomacy negotiating with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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