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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의 동학에 관한 연구 -여주 전거론과 원적산의 해월 묘소형성을 중심으로 = A Study on the Yeoju's Donghak and Last of Haewol Choi Si-Hyung
저자
임형진 (경희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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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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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1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43-8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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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eonggi-do was an area where Donghak had already spread in the 1860s when Donghak was founded. Yeoju's Donghak participated in Donghak's pursuit of equality of manmin and efforts to build a heaven on earth. During the Donghak Revolution in 1894, Yeoju's fellows participated as hard as any other area. Hong Byeong-gi and Im Sun-ho's work, a representative Donghakdo, proves this. In particular, Hong Byung-ki and Im Sun-ho all followed Haewol Choi Si-hyung without any disturbance until the end and kept his loyalty to Uam Sohn Byung-hee. Yeoju can be a city of Donghak because the spirit of Minbon since King Sejong is best embodied. If King Sejong suggested the principle and direction of Minbon, Donghak was an ideology, religion, and movement that concretely practiced it in life. Yeoju, in particular, is buried with the great pioneers of King Sejong and Haewol Choi. In Yeoju, the spirit of Minbon is blossoming together. Along with the frustration of the Donghak Revolution, the long-running path of Haewol Choi Si-Hyung ends. Old and sick, Haewol Choi Si-Hyung passes on to Uiam Sohn Byung-hee, who becomes the 3rd principal. That site was Yeoju's "jeongeolon" Yeoju's jeongeolon is the land of generational change informing the new beginning of our modern history. In Yeoju, Gyeonggi-do, Sohn Byung-hee and his men again pledged to rebuild Donghak and create a world where people would be treated like heaven again. After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Donghak did not disappear, but rather led the people's movement. After the change to Cheondogyo, he led the people's movement. Cheondogyo not only planned and led the 3.1 National Revolution, but it was also their national cultural movement in Korea. Yeoju was the starting point of the nation by finishing the Donghak era and opening the Cheondogyo era.
더보기경기도는 동학이 창도된 1860년대에 이미 접주가 있을 정도로 동학의 전파가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동학이 추구했던 만민평등의 모두가 한울님을 모신지상천국을 노력에 여주의 동학도 동참하였다. 1894년 갑오년 당시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여주의 동학도들은 열심히 참여하였다. 많은 접주들의 수가 그것을 확인시키는데 대표적인 동학도인 홍병기와 임순호의 행적에서도읽을 수가 있다. 홍병기와 임순호는 모두 끝까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해월 최시형을 추종했으며 의암 손병희에게 의리를 지켰다.
여주가 동학의 도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세종대왕 이래로의 민본의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대왕이 민본의 원칙과 방향을 제시했다면 동학은 그것을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이념이자 종교이고 운동이었다. 특히 여주는 가장 높은 신분인 세종대왕과 가장 하찮은 신분이었던 해월 최시형이라는 위대한 선각자들이 영면하고 있는 장소이다. 극과 극이 만나는 것처럼 여주에서는 민본의 정신이 함께 꽃피고 있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좌절과 함께 해월 최시형의 오랜 고행의 길도 종결된다.
이미 늙고 병든 해월은 스승인 수운 최제우가 자신에게 도를 넘겼듯 3대 교주가 되는 의암 손병희에게 도통을 넘긴다. 그 현장이 바로 여주의 전거론이었다. 여주의 전거론은 우리 근대사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세대교체의 땅인것이다.
경기도 여주에서 손병희와 그의 수뇌들은 다시금 동학을 재건하고 조선의모든 민중들에게 다시 또 사람이 하늘처럼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라는 스승님의 말씀을 실천하기를 다짐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민중운동에 앞장섰다. 갑진개화혁신운동을 통하여 민중들의 위생적이고 실용적인 삶을 지향했으며 천도교로 변경된 이후에는 더욱민도를 높이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토가 일본에 강제로 병탄된 뒤에도 천도교는 3.1 민족혁명이라는 거족적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을 뿐 아니라이후 국내에서의 민족문화운동도 그들의 몫이었다. 어쩌면 여주시는 동학시대를 마무리하고 천도교 시대를 열면서 민족의 앞길에 여전히 향도와도 같은역할을 하는 시발점의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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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12-23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Journal of Donghak Studies ->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 KCI후보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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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7 | 0.7 | 0.62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8 | 0.55 | 0.797 | 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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