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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위덕왕대 王弟 季의 활동과 왕위 계승 = The Role of King’s Brother Gye and Succession of the Throne in the Reign of King Wideok of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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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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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has been understood that Baekje was in a state of confusion after the defeat of the battle in Gwansan fortress (554 CE) because it was considered King Mu (600-641 CE) came to throne unexpectedly according to the article of King Mu, Samguk Yusa. However, the article should be viewed as a tale that explains the origin of Mireuk temple. Based on Samguk Sagi, King Mu succeeded the throne as a son of King Beop (599-600 CE) who was a son of King Hye (598-599 CE), that is Gye. Gye was a younger brother of King Wideok (554-598 CE), that is Chang.
According to King Chang’s inscription on stone reliquary excavated from the temple site in Neungsan-ri, Buyeo, it can be understood that king’s authority was sustained on the basis of the King Seong’s royal lineage. Gye also played an important role, especially in the field of the relation with Wa (Japan).
After the defeat of the battle in Gwansan fortress, Gye was delegated to Japan as an envoy. Although he failed to receive military assistance, he developed personal relationship with Soga family which was the government’s major political party. Followed by a year, he returned back with a small group of troops as escort, that showed his political and diplomatic capability. Although the interrelation between Baekje and Japan ceased for 20 years, it resumed in 575 CE following the change of political situation at Korean peninsula. The relationship with Japan was still important with Baekje in this period, so Gye’s role and influence expanded.
The inscription on bronze reliquary excavated in ‘Wangheung temple site’ in Buyeo has confirmed the fact that the prince of King Wideok has passed away in 577. After the death of King Wideok’s only prince, the king accepted Gye as his successor.
The role of the King’s Brother Gye in the king Wideok period and his succession to the throne led to a new genealogy of kings in the late Baekje Kingdom. In addition, the powers accumulated during this period later became the basis for the strengthening of the royal authority of King Mu and King Euija (641-660 CE), and furthermore, Baekje was the driving force for the revival of the kingdom.
百濟 泗沘時代의 정치사는 管山城 패전을 겪으면서 왕권이 동요한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이것은 『三國遺事』 武王條를 중요한 사료로 받아들이면서 무왕이 정상적인 왕위 계승을 하지 못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왕조는 기본적으로 彌勒寺 창건에 대한 연기설화라고 보아야 한다.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新羅의 영향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덧붙여지면서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무왕은 역시 『三國史記』의 기록처럼 法王의 아들로서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법왕의 아버지이자 威德王의 아우인 季(惠王)의 존재가 주목되는 것이다.
백제는 관산성에서 패전을 겪었지만, 扶餘 陵山里 寺址의 「昌王銘石造舍利龕」銘文을 통하여 위덕왕대 왕권이 聖王系 왕족을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이면에는 위덕왕의 同氣들이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계는 성왕계 왕족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계는 관산성 패전 직후인 위덕왕 2년(555)에 청병사 자격으로 倭에 파견되었다. 비록 대규모 청병에는 실패하였지만, 왜에 머물면서 정권의 유력 씨족인 蘇我氏 세력과 사적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또한 이듬해에 호위 성격의 군사집단과 귀국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외교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이후에 백제와 왜의 교섭이 20여 년간 공백기를 맞이하였지만, 한반도 정세의 변화로 위덕왕 22년(575)에 對倭 교섭이 재개되었다. 여전히 백제에게 대왜 교섭은 중요하였으며, 계의 역할과 영향력도 점차 증대되었을 것이다.
扶餘 王興寺址에서 출토된 「靑銅製舍利盒」명문은 위덕왕 24년(577)에 왕자가 사망한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사찰 건립과 사리봉안의식을 주도적으로 행하였다. 이는 죽은 왕자가 위덕왕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위덕왕은 유일한 아들이 사망하자, 성왕계 왕족의 핵심이며 자신의 왕권을 뒷받침해왔던 계를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위덕왕대에 이루어진 왕제 계의 역할과 그의 왕위 계승은 백제말기를 새로운 왕계로 이끌게 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축적된 힘은 훗날 무왕과 義慈王代 왕권강화의 토대로 작용하였으며, 더 나아가 백제가 다시 한 번 중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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