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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한국대표부’의 외교활동 -김규식의 활동을 중심으로- = Diplomatic Activities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of Paris in 1919 -Focusing on Kim Kyu-Sik’s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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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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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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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의 파리는 ‘세계의 수도’였다. 1차 대전 후 파리강화회의는 세계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무대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었던 여러 식민지 약소국가들은 강화회의를 자신들의 독립의 기회로 삼고 파리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한국도 그중의 하나였다.
신한청년당의 대표 자격으로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첫째, 한국의 현실과 일제의 폭압을 알리는 공보활동. 둘째, 유력한 언론과 지도자들의 동정과 우호적인 연대. 셋째, 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에 관한 정식 청원서 제출 등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활동을 전개했다.
김규식은 4월 14일 파리 9구 샤토덩 38번지에 한국통신국을 설치하고 공식적인 홍보 활동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한국의 현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 독립을 위한 지원을 호소하기 위하여 「통신전(通信箋, Circulaire)」을 발행하였다. 「통신전」은 유럽내 각 언론기관과 강화회의의 각국 대표 및 저명 인사 및 강화회의의 영향력이 미치는 어디에든 빠짐없이 송부되었다.
5월 10일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 정식으로 청원서와 비망록을 제출하였다. 각지에 송부한 청원서와 비망록의 숫자는 실로 엄청난 양에 이르렀다.
한국대표단은 5월 초순 김탕, 5월 18일 이관용, 6월 3일 여운홍과 황기환, 6월 말 조소앙이 파리에 도착하면서 한국대표단의 진용을 갖추었다.
한국대표단은 약소민족에 관심을 가진 프랑스 사회당, 인권연맹, 언론인, 그리고 중국대표단을 비롯한 약소국가의 대표단 등 다양한 인사들과도 기맥을 통했다. 그중 이유잉과 에밀블라베의 도움은 무엇보다 컸다. 특히 인권연맹 회원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후일 ‘한국친우회’가 창립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국대표단은 다른 약소국가의 대표단, 지도자들과도 연대를 모색했다. 그중 호치민은 김규식을 비롯한 조소앙, 황기환 등의 한국대표단과 밀접한 관계를 나누었다.
김규식은 ‘민족들의 권리연맹’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이 연맹은 당시 약소국가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각각 처한 상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창립된 조직이었다.
또한 한국대표단은 국제회의에 대표들을 파견하여, 일제의 가혹한 지배와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하여 노력했다. 김규식은 국제 사회주의자연합에 서신을 보내어 ‘한국민족연합’의 대표 자격으로서 대회 참여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혔다. 이후 이 임무는 이관용과 조소앙에게 맡겨져 스위스 루체른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에서 ‘한국독립에 관한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규식이 파리를 떠난 이후 모든 업무는 황기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황기환은 무르만스크에서 오갈데 없던 한인노동자들의 구출하여 프랑스 스위프로 이주시켰다. 이들은 ‘재법한국민회’를 결성하여 한국대표단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인권연맹의 인사들과 꾸준히 좋은 관계를 가졌던 한국대표단은 1920년 1월 8일 지리학회 강당에서 ‘한국문제 연설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여 참석한 인사들에게 많은 동정과 지지를 받았다.
파리강화회의가 진행되던 파리에서 5개월 남짓 체류했던 김규식과 한국대표단의 활약은 괄목한 것이었다. 비록 그들의 활동이 바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한국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소수의 인원과 ...
Paris in 1919 was the ‘capital of the world’. After World War I, the Paris Peace Conference was a stage for a new reorganization of world order. Encouraged by the President Wilson’s national self-determination ideas, small and weak nations and several colonies made diplomacy by sending delegations to Paris, using the conference as an opportunity for their independence. Korea was one of them.
First, Kim Kyu-Sik arrived in Paris as a representative of the Shinhan Youth Party and launched publicity campaigns to inform about the situation in Korea and the reality of the Japanese colonial rule. Secondly, he worked out to get the sympathy and friendly solidarity of influential media and leaders. Thirdly, he conducted activities with the task of submitting a formal petition on Korea’s independence to the Peace Conference.
Kim Kyu-Sik set up the Korean Communication Agency on April 14, 1919, at Chateaudun Street, N.38, in the 9th Arrondissement of Paris, and began official promotional activities. First of all, a newsletter entitled Circulaire has been issued to provide information on the reality of Korea and to call for support for the Korean independence. This Circulaire had been sent to all media organizations in Europe and to the representatives of each country at the Peace Conference, as well as to all places which could influence the Peace Conference.
On May 10, Kim Kyu-Sik formally submitted a Petition and a Memorandum to the Paris Peace Conference. The number of petitions and memorandums sent to several places was important.
The Korean delegation has been completed by the arrival of Kim Tang in early May, Lee Kwan-Yong on May 18, Yeo Un-Hong and Hwang Ki-Hwan on June 3, and Jo So-Ang in late June.
The Korean delegation also worked with a variety of people, including the French Socialist Party, the Human Rights Federation, journalists, and the delegations of small and weak nations, including the Chinese delegation. Among them, Li Yu-Ying and Emile Blavet’s help was greater than anything. In particular, through active exchanges with the members of the Human Rights Federation, a Korean Friends Society (Amis de la Corée) was founded later. The Korean delegation also sought solidarity with delegations and leaders from other small and weak nations. Among them, Ho Chi Minh had close relations with the Korean delegations members such as Kim Kyu-Sik, Jo So-Ang and Hwang Ki-Hwan.
Kim Kyu-Sik participated as a promoter of the ‘Nations Rights Alliance.’ This federation was founded at the time to represent the rights of the small and weak nations and to inform the world about their situation.
The Korean delegation also dispatched representatives to international conferences to clarify the harsh rule of Japan and the legitimacy of Korea’s independence. Kim Kyu-Sik sent a letter to the International Socialist Union, proactively expressing his intention to participate as a representative of the Korean Nation Union. Later, the mission was left to Lee Kwan-Yong and Jo So-Ang and a “Resolution on Korean Independence” was unanimously adopted at the Lucerne International Socialist Congress in Switzerland.
After the departure of Kim Kyu-Sik from Paris, all work was centralized by Hwang Ki-hwan. Hwang Ki-Hwan rescued some Korean workers from Murmansk and moved them to the French Suippes village. They formed a legal “Korean Association of Koreans in France” to support the Korean delegation’s independence movement.
The Korean delegation, which had a good relationship with the members of the Human Rights Federation, received a lot of sympathy and support from those who attended by holding a “Korean Problem Speech Conference” at the Geographical Auditorium on January 8, 1920.
Kim Kyu-Sik and the Korean delegation who stayed in Paris for more than five months during the Paris Peace Conference were remarkable. Although their activities did not produce tangible results, it should be appreciated that the Korean 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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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0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 KCI후보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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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59 | 0.59 | 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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