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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 불교 세력의 침투와 불교계의 동향 = The Infiltration of Japanese Buddhist Power and the Trend of Buddhist Circle in Modern Times
저자
김순석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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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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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연도
2008
작성언어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후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65-91(27쪽)
KCI 피인용횟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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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불교사는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자주적인 발전을 지향하였으나 나라가 망한 이후 식민지 권력의 통제와 간섭으로 또 다시 시련과 좌절로 점철된 역사이다. 개항과 더불어 일본 물교 세력의 상륙으로 시작된 우리 근대 불교사는 일본 불교의 세력 확장에 대응하면서 나름대로 자주적인 발전을 지향하였지만 그 행보는 더디고 지루하였다. 그 원인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억불정책으로 일반 대중 승려들이 교육 받지 못한 것이 하나의 큰 요인이었다. 일본 불교 세력의 침투는 정치적인 변화가 있을 때마다 조직적이고 단계적으로 강도가 높아져 갔지만 불교계는 속수무책으로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일본 불교 세력은 막부정권이 무너지고 천황제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끝까지 막부정권을 후원하였다. 그런 까닭에 천황제가 확립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불교계는 자구책으로 충성을 약속하면서 조선을 비롯해서, 사할린 등지의 해외 식민지 포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계가 조선에 포교사를 파견한 것은 그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일본 불교 세력의 세력 확장에 직면한 조선불교계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주체적인 면모를 과시하기에는 너무도 세력이 미약하였다. 그런 까닭에 초기에는 일본 불교의 교육체제와 포교방법을 모방하여 면모를 일신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원흥사의 창건과 불교연구회의 설립으로 나타났으며 명진학교의 설립으로 구체화되었다. 명진학교의 설립 목적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포교사를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근대 사회에 들어 불교계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은 교계의 대표 52명이 1908년 원흥사에 모여 최초의 종단인 원종을 설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교계의 대표들은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해인사의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하고 조직을 정비하고, 의연금을 모아 각황사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종정이었던 이회광은 원종의 정부 승인을 받는 문제로 고심하다가 일본의 포교방법을 배운다는 미명 아래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성사시켰다. 이러한 상황이 불교계에 알려지자 민족진영의 승려들은 이회광을 매종행위자로 규탄하고, 연합맹약의 무효를 선언하면서 임제종을 설립하여 정통성을 전명하였다. 임제종은 호남과 영남 지역을 거점으로 불교계의 자주성을 회복하려 하였고, 원종은 북쪽인 중앙에서 명맥을 유지하여 모처럼 성립된 종단은 양분되는 사태를 맞았다. 결국 두 종단은 나라가 망한 1912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하여 원종은 ‘30본산주지회의원’으로 변경되었고, 임제종은 해산된다.
Escaping from the policy of suppressing Buddhism of Joseon Dynasty and pursuing its own independent development, the recent history of Buddhism in Korea is again dotted with tribulation and frustration due to control and intervention of colonial power after collapse of the country. Beginning with the opening port followed by the arrival of Japanese Buddhist power, our recent history of Buddhism coped with the expanding power of Japanese Buddhism and pursued its own independent development, but the progress was slow and tedious. In the course of establishing emperor system after the collapse of Shogunate political regime, the power of Japanese Buddhism supported Shogunate political regime to the end. Feeling crisis after emperor system was established, the Buddhist circle was forced to advance to Joseon, Sakhalin, etc so as to perform its missionary work in overseas colony as a self-relieving policy. Facing the expanding power of Japanese Buddhist, Joseon Buddhist circle was too weak to establish its identity and show independent aspect. Thus, it tried to change its appearance at the beginning by imitating the educational system and propagation method of Japanese Buddhism. Appearing through the inauguration of Wonheungsa and the establishment of Buddhism Research Institute, such shape was embodied by the establishment of Myeongjin School. Myeongjin School was established to cultivate propagator who can adapt to new age.
Entering the modern society, the movement to search new direction of Buddhist circle was shown by the first religious order, Wonjong which was established by 52 representatives of Buddhist circle gathering in Wonheungsa in 1908. Establishing Wonjong Jongmuwon, the representatives of Buddhist circle nominated Lee Hoe Gwang of Haeinsa as supreme patriarch, arranged the organization and constructed Gakhwangsa by raising subscription. However, pondering over the issue of getting governmental approval of Wonjong, Lee Hoe Gwang, the supreme patriarch concluded the alliance pact with Jodongjong of Japan in the pretext of learning propagation method of Japan. As such situation was known to the Buddhist circle, the monks of ethnic group denounced Lee Hoe Gwang as a betrayer of religion, proclaimed the nullification of alliance pact and establish Imjaejong to promulgate the orthodoxy. Imjaejong tried to recover the independence of Buddhist circle on the base of Honam and Youngnam and Wonjong remained in existence at the north center. After all, the 2 religious orders were dissolved by Joseon Government-General in 1912 when the country ruined.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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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2006-07-12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Institute of Korean Studies -> Center for Korean Studies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75 | 0.75 | 0.68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62 | 0.59 | 1.314 | 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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