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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논문) 고도성장기 부산 합판산업의 성장과 쇠퇴(1960~1980년대) = The rise and decline of Busan plywood industry during the rapid growth period (1960-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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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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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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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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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5(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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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판은 한국에서 6.25전쟁 후의 복구수요를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대 중·후반에는 유엔군의 군납수요도 합판산업의 성장에 자극을 주었다. 군납을 통해 품질을 인정받은 한국합판은 1961년부터 미국시장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인건비의 상승과 공해우려로 일본이 합판수출에서 철수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한국의 합판산업은 19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세계 5위의 합판생산국에 세계 1위의 합판수출국이 되었다.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이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부산은 한국최대의 합판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세계적인 합판도시가 되었다. 합판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부산은 한국산업의 중심도시였다. 한때 한국수출의 29.2%의 수출을 담당하던 도시가 부산이었다. 여기에는 합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 부산에는 당시 세계최대의 합판기업이었던 동명목재를 비롯하여 6개의 대규모 수출 합판업체들이 있었는데, 이들 기업은 한국합판생산의 절반을 상회하는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1970년 동명목재의 생산량은 우리나라전체 합판생산량의 31.2%를 차지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이른바 합판의 시대였고, 부산의 시대였고 또 동명의 시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성장기반은 취약하였다. 원목의 도입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했고 저임금이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였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실제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다. 생산가에서 차지하는 원재료의 비중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게 한 것은 정부의 각종 지원이었다. 각종 수출지원으로 합판기업들은 흑자를 볼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외화가득률은 낮았다. 1970년대 말까지 합판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자원민족주의로 인해 원목의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한국 합판산업은 위기에 직면하였다. 합판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는 원목가격과 함께 수출길이 막히면서 합판산업은 위기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1980년 세계 최대의 합판기업 동명목재가 도산을 하였고 잇달아 기업들이 쓰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에 의한 합판산업의 구조조정이 시행되었다. 동명목재에 이어 부산에서는 태창목재, 반도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가 퇴출되었다. 6개의 합판수출대기업 가운데 성창기업만이 부산에서 살아남았다. 일반적으로 과잉설비의 정리가 지역별로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라고 보면 부산기업들의 집중 퇴출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합판산업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합판산업의 중심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하였다.
더보기Plywood industry grew based on the demand coming from restoration after Korean war. Supplying to UN military in the mid and late 1950 also stimulates the growth. Military purveyance guaranteed the quality of plywood, making export to the United States possible since 1961. In accordance with timely decline of Japanese plywood industry due to rising wage and environmental worries, Korean plywood industry achieved the splendid growth after the mid 1960, ranked fifth place in the world as a producer and first place as a exporter in 1970s. Busan was the centre of the industry. Busan became the largest and an international city for the plywood industry. During the highlights of the plywood industry, Busan was the centre of Korean industries. Busan was once in charge of 29.2% of total export of Korea, and plywood industry played a big role here. In 1970, Busan had six of large plywood-export companies including Dongmyoung, the largest one in the world, and these companies produced over the half of the total plywood output of Korea. Also, Dongmyoung produced 31.2 percentages of total output of Korea. The late 1960 to the mid 1970 was the period of plywood industry, of Busan, and of Dongmyoung. However, the foundation of the industry was weak in that the wage had to be kept low and import of hardwood had to be sustained. It was difficult to raise actual profits under these conditions since the cost of raw material was too high in production cost. The government``s various support eliminated these limitations. Many firms could gain profits and grow due to diverse supports for export, but a foreign-exchange earning rate was low. The plywood industry enjoyed its heyday until late 1970. However, the industry faced the challenge as it could not import raw materials more due to resource nationalism after the first oil crisis. The plywood industry came to a crisis as the way to export was blocked since price of raw material increased more rapidly than that of plywood. Finally Dongmyoung, the largest company in the world, went bankrupt in 1980 and other companies consequently went bankrupt too. The government carried out structural adjustment in this situation. Followed by Dongmyoung, Taechang, Bando, Kwangmyeong, and Daemyeong in Busan were liquidated. Only Seongchang survived among the largest six Busan companies. If we say that reducing excessive equipment should be carried out equally across regions, the concentrated liquidation of Busan companies is an aberration. After this structural adjustment, the centre of plywood industry moved from Busan to In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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