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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의 순회전도가 영남지역의 3.1만세운동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 = A Study on the Influence of Bae We Ryang’s (裵緯良, William M. Baird, 1862.6.16.∼1931.11.28) Evangelical Journey on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Youngnam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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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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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민족사적으로 중요하고 획기적인 일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민족정신은 구국운동으로 번져갔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 거사 실행단계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배위량의 열정적인 복음 전도 활동이 영남지역의 3.1만 세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에 대하여 탐구했다. 배위량은 1891년 1월 29일에 부산항에 도착함으로 한국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던 인물이다. 그는 부산에서 선교 지부를 개척할 땅을 사기 위하여 1891년 2월 25일에 부산으로 내려왔다.
배위량은 영남지역의 3.1만세운동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남지역에서 행한 그의 선교 사역이 영남지역의 3.1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가 3.1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점에 주목하여 배위량과 영남지역의 3.1운동의 관련성을 찾고자 한다.
그는 부산에 터전을 마련하고 1891년 9월 24일부터 부산 선교 지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892년 6월에 완공했다. 배위량은 처음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하여 1) 순회전도, 2) 사랑방 전도, 3) 수세자들과 초량교회 설립, 4) 한문학교 설립 등을 통하여 한국 선교의 기틀을 놓았다. 배위량은 부산과 대구를 근거지로 하여 원대한 선교 계획으로 일했다.
배위량은 1896년 4월에 평생 살 생각으로 대구로 이사하여 대구를 근거지로 영남지역을 선교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북장로교 선교부는 그의 임지를 서울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래서 배위량은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의 후임인 안의와(安義窩=아담스, James Edward Adams, 1867∼1929), 장인차(張仁車=존슨, Dr. Woodbridge O. Johnson, 1869∼1951) 그리고 부해리(傅海利=브루엔, Henry Munro Bruen, 1874∼1959)는 배위량의 선교 정신을 이어 받아 영남지역 선교를 위하여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영남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대구와 부산 등 도시에서 먼저 시작되어 농촌으로 확대되어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운동이 되었다. 그런데 영남지역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선도했던 그룹은 기독교 인사들과 학생들이었다. 대구 3.8운동은 대구 교계 지도자들에 의하여 계획되고 시작되었다.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길은 영남 북부지역을 복음화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영남지역의 3.1운동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데서 다른 지역과 다른 특색을 가진다. 배위량은 영남지역 전 지역을 대상으로 다니면서 순회전도를 감행했다. 이 점에서 영남지역의 교회 탄생은 배위량과 깊이 연관되고 영남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은 순회전도 여행을 다닌 지역과 관련된다. 그래서 영남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대한 연구에서 배위량과 관련된 개연성을 찾는 것이 영남지역의 3.1운동의 특색을 찾는 데 중요한 길이 될 것이다.
The centenary of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falls in the year of 2019. The March First Movement is an important and epoch-making event in the history of Korea. The national spirit derived from this incident spread to a save-the-nation movement. The Korean Church took a leading role from the preparation stage of the uprising to the execution stage.
In this paper, the author explores how the passionate evangelical activities of Bae We Ryang affected the March First Manse (“hurrah”) Movement in the Gyeongsang (or Youngnam) region. Bae We Ryang was the first person to make a connection with Korea by arriving at Busan port on January 29, 1891. He came down to Busan on February 25, 1891 to buy land for a missionary branch in Busan.
Although Bae’s misssionary work may not be directly related to the March First Manse Movement in the Gyeongsang region, his import- ance should not be overlooked in focusing on how the results of his missionary work affected the March First Movement in the region. The author attempts to seek relevance between his role and the March First Movement in Gyeongsang region.
After he set up a base in Busan, he began building the structure of the Busan Mission Branch on September 24, 1891 and completed it in June of 1892. Bae We Ryang first established the foundation of the mission in Korea by conducting missionary work mainly in Busan through 1) Itinerating travel; 2) conducting guests to a reception room in a house; 3) establishing Choryang Church with all the baptized persons; 4) establishing a Chinese literary school. He did missionary work with Busan and Daegu as centers having a far-reaching plan in mind.
Bae We Ryang moved to Daegu in April 1896, hoping to preach the gospel there all his life, but before long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PCUSA) made him move to Seoul and Pyongyang. His successors, James Edward Adams (1867∼ 1929), Dr. Woodbridge O. Johnson (1869∼1951) and Henry Munro Bruen (1874∼1959) were given many missionary roles to evangelize people in the Youngnam region.
In the Youngnam region, the March First Movement starting first in cities such as Daegu and Busan expanded to rural areas and then became the most powerful movement in the country. The demonstrations in the Gyeongsang region were led by Christian leaders and students. Daegu’s March Eighth Movement (대구 3.8운동) was planned and started by Daegu’s Christian religious leaders. Bae’s second missionary journey has been viewed as a major source of evangelization for the northern part of Youngnam areas.
During the March First Movement in the Gyeongsang region, Christian leaders and believers played pivotal roles. Bae preached the gospel throughout the entire Youngnam region and the birth of churches there could all be deeply related to him. The March First Movement in Youngnam is connected with the regions where he made his rounds for the gospel. Therefore, it remains an important source for research in relating Bae We Ryang with studies on the March First Movement in the Youngnam region.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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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12-07-13 | 학회명변경 | 영문명 : Young 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versity -> Young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iversity | KCI후보 |
2012-07-13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Journal Of Young San Theology -> Journal of Youngsan Theology | KCI후보 |
2012-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10-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2009-06-09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오순절신학연구소 -> 영산신학연구소영문명 : Institute for Pentacostal Studies -> Young San Theological Institute of Hansei Unversity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54 | 0.54 | 0.59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8 | 0.49 | 0.43 | 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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