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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출신 여성정치가 박현숙 = A Study on the Female Politician Park Hyeon-suk who Used to be an Independent Activist
저자
김지연 (수원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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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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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51-287(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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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n in 1896 in Pyongyang, Park Hyeon-suk actively joined in independence movement by participating in Songjuk Suicide Squad, Korean Women's Organization, and Geunwoo Association centering on Pyongyang region between 1910 and 1920. She was also one of the leaders of the March 1st Movement held in Pyongyang region in 1919. Park collected war funds through activity by Korean Women's Organization and led Pyongyang branch of Geunwoo Association by participating as a promoter of the regional branch.
After the emancipation in 1945, she started working with Cho Man-sik, and joined the right-wing organization in South Korea based on Korean Women 's National Party after defecting to the South in 1946. She became the female director of the General Headquarters for National Unification that was led by Lee Seung-man and Kim Gu as the president and vice-president, respectively. It seems that Park Hyeon-suk tried to establish a new independent country and achieve national unification through the General Headquarters for National Unification.
Park joined the Federation of Koran Women to voice her opinion for women's participation in lawmaking and was selected as one of the female lawmakers when South Korean Interim Legislative Assembly was established. In the Assembly, she made effort to abolish the prostitution system, and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finally determined to officially do away with the system. While working as a lawmaker, Park Hyeon-suk agreed with the Election of National Assembly Members Act, which was a female quota. Although she did not lead the way to the enactment of the Act, her writings show what she thought about the female quota.
After the unitary government had been established, Park was appointed as a minister without portfolio. During the harsh times of the Korean War, she carried out her duty as a governmental official by encouraging women and consoling men of the armed forces. Despite being a minister, however, she remained as a marginal person in the political world, which shows social limitations as a woman.
Later, Park Hyeon-suk joined the 4th and 6th national assembly. The 4th national assembly, in particular, has significance in that she became a member of the national assembly through direct election. Her being elected and activity in the national assembly show the limitations and difficulties for women to participate in politics back then.
박현숙은 1910~1920년도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송죽결사대, 대한애국부인회, 근우회에 참여하며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19년 평양지역의 3.1운동의 주도자 중 한 명으로 평양지역의 3.1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을 통해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했으며 이후 근우회 평양지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양에 근우회 지회를 이끌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남으로 내려온 박현숙은 여자국민당을 기반으로 하여 이남의 우익 단체에 가담한다. 이승만과 김구가 각각 총재, 부총재가 되어 이끈 민족통일총본부에서 부녀부장을 한다. 박현숙은 민족통일총본부를 통해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과 민족통일을 이루려한 것으로 보여진다.
박현숙은 여성단체총연맹에 참가하여 여성들의 입법의원 참여에 목소리를 내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발족되었을 때 여성입법의원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다. 여기에서 박현숙은 공창제 폐지를 위해서 노력하였고, 결국 미군정에 의해 공창제 폐지가 공식적으로 결정된다.
박현숙은 입법의원 시절 여성할당제인 국회의원선거법에도 찬성하였다. 비록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하기 위해서 박현숙이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이후 박현숙의 글을 통해서 여성할당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볼 수 있다.
박현숙은 단일 정부가 출범되고 이승만 정부에서 무임소장관에 임명된다. 한국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여성들을 독려하고 국군장병들을 위문하는 등 공직자로서 국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장관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계에서 주변인의 위치에 머물러 있는, 여성이 가지는 사회적인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후 박현숙은 제4대, 6대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참여한다. 특히 제4대 국회의 경우, 직선을 통해 국회에 진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박현숙의 국회의원 당선과 활동을 통해서 당시 여성들의 정치 진출의 한계와 어려움을 알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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