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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의 생애와 항일무장투쟁 = Seo Il's Life and his Anti-Japanese armed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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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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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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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C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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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수록면
47-86(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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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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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은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함경도의 대표적인 유학자 김노규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1902년 함일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고향에서 10년간 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다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왕청현 덕원리에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하다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서일은 대종교 제1세 교주 나철로부터 대종교 교리를 전수받고 대종교에 귀의하였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과 함께 만주에서 대종교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서일이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선 것은 1911년 이후이다. 그는 북간도로 건너온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3월 중광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되었다. 중광단은 1919년 5월 일부 공교도들과 연합하여 대한정의단으로 발전시켜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이어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은 김좌진·조성환등 군사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길림군정사와 연합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군정서는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의 추격을 피해 서일은 대한군정서를 소만 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시키고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 등 10여 개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총대로 추대되었다. 자유시참변으로 타격을 입고 밀산에서 재기를 준비하던 중 1921년 8월 26일 수백 명의 토비들의 야습을 받게 되자 다음날인 27일 서일은 독립군 지휘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 순국하였다. 서일은 평생을 대종교 정신으로 수도하는 종교인의 자세로 살았고 중광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 것도 대종교 투쟁목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서일의 항일무장투쟁은 단순히 대일항전을 통한 민족독립을 넘어서 대종교의 이상국가 건설과도 직결된다. 이러한 목표완성을 위해서는 조국광복을 위한 투철한 투쟁정신과 더불어 종교적 완성을 위한 수행과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서일은 수전병행의 행동철학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Seo Il was born in Gyeongwon-gun, Hamgyeongbuk-do, Korea and graduated from the department of education, Hamil School in 1902 after studying Chinese classics under Kim, No-gyoo who was a representative Confucian scholar in Hamgyeong-do. After that, he flung himself into a mass-education drive and a save-the-nation drive through education, and then went into exile in Machuria when Japanese imperialism forcibly occupied Korea. Establishing Myeongdong School in Deogwon-ri, Wangchang-Hyeon, Machuria after an exile from his homeland, he worked hard for education for the people and became a believer in Daejonggyo (a religion of Korea).
Having been initiated in doctrines of Daejonggyo from Na, Cheol, the first head of Daejonggyu, he was converted to Daejonggyo. Particularly, he played a great role in expanding congregation in Manchuria with Kim, Gyo-Hyeon, the second head. He started anti-Japanese armed struggle in earnest after 1911. He organized Joonggwangdan (an organization for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with believers in Taejonggyo as the driving force in March, 1911, and he was selected as its leader. Joonggwangdan developed into Daehanjeongeuidan in concert with some believers in Gonggyo (a denomination of Confucianism) in May, 1919 and prepared an organizational armed struggle against Japan. And then Seoil, the head of Daehanjeong euidan, united with Gilimgunjeongsa, which was organized by Kim, Jwa-jin and Jo, Seong-hwan and others, and changed the name of the organization to Daehangoonjeongseo, and started anti-Japanese armed struggle in earnest. Daehangoonjeongseo gained a great victory in Battle of Cheongsan-ri in October, 1920.
Seo Il moved Daehangoonjeongseo to Milsan, the area close to the border of Russia and Manchuria in order to avoid the chase of the Japanese military, which met crushing defeat in Battle of Cheongsan-ri. He integrated about 10 armies for Korea's national independence including Daehandokripgoon (an Army for Korea's National Independence) and Daehangookminhwe (a secret organization for national independence), and formed Daehandokripgoondan (the corps for Korea's national independence), and then he was selected as its leader. As he was assaulted at night by hundreds of local bandits on 26th of August, 1921 during his preparation for recovery in Milsan after being hurt tremendously due to a tragic incident in Svobodny City in Russia, 1921, he committed suicide the next day taking responsibility as the leader of the corps.
Seo Il lived as an ascetic with religion will of Daejonggyo all through his life and led anti-Japanese armed struggle organizing Joonggwangdan. This is closely connected with the campaign goal of Daejonggyo. His anti-Japanese armed struggle is directly connected with building up an ideal country of Daejoggyo beyond national independence through anti-Japanese armed struggle. In order to accomplish this goal, asceticism and study for perfection of self through religion as well as a thorough fighting spirit for the restoration of Korea's independence were needed. Therefore Seo Il put his philosophy combining both asceticism and fighting into practice.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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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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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0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 KCI후보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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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59 | 0.59 | 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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