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후보
1920년대 아산지역 민족운동과 천도교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KDC
200
등재정보
KCI등재후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25-159(35쪽)
제공처
본고는 1920년대 아산지역에서의 민족운동과 천도교, 그리고 연 계성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1920년대 아산 지역 민족운동은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그나마 청년단체의 조직과 이를 통한 청년운동, 그리고 형평운동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정책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되 었고, 불완전하지만 집회와 결사가 가능해졌다. 이를 계기로 각 지 역에서는 우후죽순처럼 청년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아산지역에서도 3・1운동 직후 청년회나 수양단 등 청년단체가 결성되었지만, 실제는 유명무실하였다. 이후 1923년에 이르러서 아주구락부, 아산청년 회, 실업청년회 등 청년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들 단체를 조직하 는데 참여한 인물은 지역의 언론인 내지 경제인 등 유지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들 청년단체의 대중운동은 그렇게 활발하지는 못하였 다. 다만 민립대학설립운동에는 군이나 면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 들도 대거 참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아산지역 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민족운동은 형평운동이었다. 형평운동 은 당시 차별받던 백정들의 인권옹호운동이었지만 식민지배체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아산지역에는 4개의 형평사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조직 유지와 생존권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대 아산지역 천도교는 충남의 여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 당진과 서산, 홍성 등지에서는 1910년대 천도교 조직 인 교구가 설립되었지만, 아산지역은 이보다 한참 후인 1926년에 이르러서야 교구가 설립되었다. 또한 천도교는 1920년대 중앙과 지방에서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문화운동을 비롯하여 다양한 민족운 동에 참여한 바 있다. 그렇지만 아산지역은 천도교 청년단체를 조 직하지 못하였다. 이는 그만큼 천도교가 뿌리내리지 못하였음을 알 려준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산지역에서 천도교가 사회적 기반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27년 구파 천도교의 전위단체인 천도교청년동맹은 당시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회 조직에도 참여하 기도 결정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산지역은 사회운동 세 력과 천도교 세력의 미약으로 신간회를 조직하지 못하였다. 이로 볼 때 1920년대 아산지역 민족운동과 천도교는 상관관계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결론적으로 아산지역 천도교 내지 천도교인은 1920년대 아산지역 민족운동에서는 충남의 여타 지역처럼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아산지역 천 도교 조직이 이를 수행할 만큼 역량을 가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더보기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national movements, Cheondogyo, and links in the Asan region in the 1920s. In the 1920s, the national movement in the Asan region was not active. However, the organization of youth organizations, youth movements, and equity movements are representative.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Japanese colonial policy was shifted from unauthorized to cultural rule, and incomplete, but meetings and associations became possible. As a result, youth groups were organized in each region, just like the bamboo shoot. In the Asan region, youth groups such as youth meetings and retreats were formed shortly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but in reality they were not well known. Later, in 1923, youth groups such as Ajou Club, Asan Youth Association, and Unemployment Youth Association were organized. Participants in organizing these groups were local journalists and businesswomen. However, the mass movements of these youth groups were not so active. However, a large number of employees who work in the military or military are participating in the private university establishment movement. Nevertheless, the most active national movement in the Asan region in the 1920s was the equity movement. The Equity Movement was a human rights advocacy movement for the discriminated butchers at that time, but actively responded to the colonial rule. Four equilibrium organizations were formed in the Asan area, and efforts were made to maintain the organization and secure survival rights. In the 1920s, Cheondogyo in Asan was relatively weaker than in other parts of Chungnam. In Dangjin, Seosan, and Hongseong, the Diocese of Cheondogyo was established in the 1910s, but the Diocese was not established until 1926, much later. In addition, Cheondogyo organized youth groups in the central and rural areas in the 1920s and participated in various national movements, including cultural movements. However, the Asan region did not organize Cheondogyo Youth Organization. This shows that the cult is not rooted. This may be due to a number of reasons, but Cheondogyo did not have a social foundation in the Asan region. In 1927, the Chondogyo Youth League, an avant-garde group of the Gupa Chondogyo, not only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formation of the New Society, the largest national movement organization at that time, but also decided to participate in the branch organization. Nevertheless, the Asan region did not organize a new society because of the weaknesses of social movement and Cheondogyo. Thus, there is no correlation between the national movement in Asan and Cheondogyo in the 1920s. In conclusion, it can be concluded that the Cheondo and Cheondo members of the Asan region did not fulfill their role in the Asan region's national movement in the 1920s as in other parts of Chungnam. This was because the Cheondogyo organization in Asan region did not have the capacity to do this.
더보기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이 개인정보처리방침은 시행일로부터 적용되며, 법령 및 방침에 따른 변경내용의 추가, 삭제 및 정정이 있는 경우에는 변경사항의 시행 7일 전부터 공지사항을 통하여 고지할 것입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상현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