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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 박인진의 천도교 활동과 민족운동 = Moon-Am Park In Jin’s activities in Cheondo-kyo and his national movement
저자
성주현 (청암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19-250(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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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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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was the his father’s influence that made Park In Jin enter the Chendo-kyo. His farther, was from HoNam, had a narrow escape from participating the Dong-Hak revolution and kept a low profile in Hamkyong Province. He told his the stories about Su-Wun Choi Jae-Wu and Hewol Choi Si Hyeong to his son as well as story of his experience, from these Park In Jin became understood the Dong-Hak naturally, and in 1905, when he was 19, entered the Chendo-kyo, sought to live a man of religion.
After entering the Cheondo-kyo, he thoroughly lived a religious life, starting from a religious worker of the Kapsangun Diocese. He was a financier of Poongsangun Diocese as well as of Kapsangun Diocese while after 3ㆍ1 Movement he consistently carried out his responsibility to the fullest as a religious worker. Especially, he devoted himself to active in propagating Chendo-kyo after 3ㆍ1 Movement, and through this, expanded his influence to Kapsan, Poongsan, Samsoo and Changbai in Manchuria, which were under his control. Moreover, he organized actively the youth associations that were bases of youth movement leading to new cultural movement in 1920’s. He also participated in youth movement as a member of labor committee of Poongsan department of Cheondo-kyo youth party. As a result of his religious activities, he achieved the nickname of ‘YoungbukDoJeoung’.
Park In Jin also participated in national movement as well as religious movement. He led the Cheer Movement in Poonsan, when Son Byeong-Hee, the leader of Cheondo-kyo, and main religious leaders participated in 3ㆍ1 Movement. Although we could not ascertain the role of these movement because of lack of examination records and written judgments, to a certain degree we find out the his role through Maen Si Jeong who participated in cheer movement with him. Park In Jin was sentenced to 1 year and 6 months in Hamheung Prison for participating in 3ㆍ1 Movement. In the mid of 1930’s, though he did not represent the party of Cheondo-kyo, he actively organized the branch of Fatherland Restoration Association in his area, uniting with Korean Fatherland Association in Manchuria. In the situation of inclining toward the trend of pro-Japanese, it was certain that there were many conflicts in Cheondo-kyo with self-sacrifice in the name of the independence. As a result, he again was arrested and killed by Japanese police. Park In Jin devoted his life to religious and national life through Cheondo-kyo.
박인진이 천도교에 입교한 것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력이 컸다. 박인진의 아버지는 호남 출신으로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다가 구사일생으로 함경도로 은신하였다. 그는 박인진에게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편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박인진은 자연스럽게 동학을 이해하였고, 19세인 1905년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하였다.
박인진은 천도교에 입교한 이후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철저히 실천하였다. 박인진은 천도교에 입도한 이후 갑산군교구 교역자를 시작으로 일생을 종교인으로 살았다. 갑산군교구 금융원으로 종교인의 길을 시작한 박인진은 갑산군교구 강도원, 풍산군교구 금융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3ㆍ1운동 이후에도 꾸준히 교역자로서 그 책무를 다하였다. 특히 3ㆍ1운동 이후 천도교 포교에 주력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관할이라고 할 수 있는 갑산, 풍산, 삼수 그리고 만주 장백현 일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였던 청년운동의 기반인 청년단체 조직에도 적극적이었다. 자신 또한 천도교청년당 풍산부의 노동위원으로 청년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인진의 종교적 활약으로 ‘영북 도정’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박인진은 종교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박인진은 천도교의 최고 영수인 손병희를 비롯하여 주요 교역자들이 3ㆍ1운동에 참여하자 자신도 3ㆍ1운동에 참여 풍산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박인진과 관련된 신문조서나 판결문이 없어 그이 역할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한 맹시정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박인진은 3ㆍ1운동으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았고, 함흥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하였다.
또한 1930년대 중반 천도교단을 대표한 것은 아니었지만 재만한인조국광복회와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자신의 관할 지역에 조국광복회 지회를 결성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천도교단에서는 친일로 경도되어가는 상황에서 조국광복이라는 명분 아래 자신을 희생한 것은 적지 않은 갈등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로 인해 결국 박인진은 또 한 번 일경에 검거되었으며 그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볼 때 박인진은 천도교를 통해 종교인으로서의 삶과 민족운동가로서의 삶에 충실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분석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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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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