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동학농민운동 이후남원 출신 동학인과 천도교인의 활동 = The Activities of Namwon Donghak Believers and Namwon Cheondogyo Believers after Donghak Peasant Movement
저자
조규태 (한성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4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97-136(40쪽)
KCI 피인용횟수
1
제공처
This thesis is a paper about the activities of Namwon Donghak believersand Namwon Cheondogyo believers after Donghak Peasant Movement. In thispaper, I reviewed the activities of Jinbohoe and Iljinhoe by Namwon Donghakbelievers, 1904-1905. And I studied about the 3·1 Movement of NamwonCheondogyo believers. Also I looked into Singanhoe activities of NamwonCheondogyo believers.
Namwon Donghak believers as Byungchoon Lee got in touch with SihyungChoi of Donghak religious order in 1895. And after the death of Sihyung Choi,they took Byunghee Son to their leader.
In 1904, the Donghak believers of Namwon inaugurated Joongliphoe andchanged it to Jinbohoe. With obeying Son’s order, they withdrew from Iljinhoe,and concentrated on Cheondogyo religious activities. Their status ascendedgradually.
The Namwon Cheondogyu believers did 3·1 Movement under the lead ofTaehong Yu and Byunghyun Choi. Especially Kiyoung Park planed to open thesecond 3·1 movement in 1920. But by being arrested by Japanese authorities,he could not accomplish his dream.
Thought the Cheondogyo developed cultural movement maintainingamicable relationship with Japanese authorities after 3·1 movement, NamwonCheondogyo believers desired to keep the anti-Japanese policy. Theydeveloped 6·10 Manse Movement and Singanhoe Movement. Also they didmany social movements for peasants and labors.
이 글은 동학농민운동 이후 전북 남원 출신의 동학인과 천도교인들이 벌인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검토함으로써 이들의 사회변혁적·민족적 성격을알아보기 위한 연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먼저 동학시기에 남원 출신 동학인들이 벌인 갑진개화운동에 대해서 고찰하고, 다음으로 천도교의 창립 후남원 출신 천도교인들의 포교활동과 계몽운동을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남원출신 천도교인들의 3·1운동과 1920년대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대해서살펴보았다.
남원 출신의 동학인들은 1895년 고향에 돌아와 동덕들과 연락을 취하고 비밀리에 포교를 재개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 최시형이 이끌던 동학지도부와다시 연결을 취하였다.
남원지역의 동학인들은 1898년 최시형이 사망한 후 김연국이 아닌 손병희를 지지하였고, 그의 심복인 박인호와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1904년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지도부가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할 때, 남원 지역의 동학인들은 박인호 등과 함께 ‘中立會’를 조직하려 하였다. 물론 나중에는 동학지도부의 명령에 따라 進步會를 설립하여 친일적 개화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남원지역의 동학인들은 내심으로 일본과의 제휴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05년 12월 1일 동학이 천도교로 바뀐 후, 천도교단이 근대화운동을 추진하자 남원 출신의 천도교인들은 천도교단의 노선에 따라 교구를 설립하여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리고 남원의 천도교인들은 사범강습소와 교리강습소에서 서구의 지식을 배움으로써 근대사상을 수용하고,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남원에서는 유태홍·이기동을 비롯한전현직 교구장 등 임원과 강습소를 통하여 성장한 박기영 최병현 등의 청년지도자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지도하였다. 유태홍은 1919년 3월 2일 독립선언서 40매를 수령하여 남원 읍내와 이백면, 산내면 등지의 요처에 부착하도록한 후, 남원지역의 주민들을 분격시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태홍의 계획은 일제 관헌의 저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유태홍과 최병현 등 남원지역 천도교인의 활동은 1919년 4월 4일 읍내에서의 시위와 인근 지역인 구례와 장수에서의 독립만세시위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그리고 박기영과 최병현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중앙총부에 전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박기영은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 하였다. 박기영은 1919년 8월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터 독립문서를 받아 서울 시내에 배포함으로써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그는 3·1운동 1주년을 맞아 대전, 대구, 목포, 마산 등지에 배포하여 제2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거사 직전에 체포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자신의 행위를 숨김으로써 석방된 박기영은 1920년 중후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계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려다가 체포되어 3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남원지역의 천도교인들은 천도교에서 추진한 문화운동에 동조하지않았다. 천도교청년회에서는 사회진화론과 문명론에 입각한 문화주의와 문화운동론을 전파하여 자율적·진취적 인간을 양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사회를 변혁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의 기회를 엿보려 하였...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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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12-23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Journal of Donghak Studies ->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 KCI후보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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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7 | 0.7 | 0.62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8 | 0.55 | 0.797 | 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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