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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의 생애와 의열투쟁 = Kim, Ik-sang's Life and his Heroic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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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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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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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C
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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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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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11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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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에는 의열투쟁이라는 독특한 방략이 있었다. 이는 죽음을 무릅쓰고 온 인류에게 자유와 정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민족의 대의를 밝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열투쟁은 테러와 매우 다르다. 우선 테러는 개인이나 일부 집단 혹은 단체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의열투쟁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공격대상 또한 테러는 불특정 다수로 삼아 선량한 시민의 피해가 크지만, 의열투쟁은 침략 원흉이나 공공의 적 또는 식민기관이나 단체 등 소수로 특정한다. 또한 의열투쟁은 정정당당하게 거사의 목적·이유·주체를 밝히지만, 테러는 그렇지 않다.
달리 말하면 의열투쟁은 부귀와 영화를 위한 것도, 개인의 공명심에 의한 것도 아니다. 크게는 천하의 정의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작게는 사회를 변혁하고 민족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의열투쟁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거기에는 의사와 열사가 오랫동안 견지해온 사상과 철학, 조국애와 민족혼이 녹아 있는 것이다. 이 연구는 바로 그 같은 독립운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김익상의 생애와 의열투쟁을 고찰한 것이다. 김익상은 불우한 처지에서 성장하면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철공소 공원과 연초회사 직원으로 호구지책을 삼았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품었던 비행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섰다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이라는 더 큰 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자원하여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를 결행하였고, 또 상해 황포탄에서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는 의거를 단행하였다.
김익상이 결행한 두 의거는 시쳇말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당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거는 성패와 관계없이 실행 그 자체가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는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를 펴며 한국 민족이 그에 동조하고 있다는 일제의 선전을 보기 좋게 받아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가 자랑하던 물샐틈 없는 치안망을 뚫고 식민통치의 심장부를 타격함으로써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한국 민중에게 통쾌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의열투쟁을 불러일으킨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후 추진된 의열단의 제2차, 제3차 대규모 '암살·파괴'투쟁의 계획과 실천도 여기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나아가 황포탄 의거는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거기에 관련된 영국, 미국 등 서구에도 한국민족의 독립문제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의거의 성패여부와 상관없이 의열투쟁의 본연의 뜻인 '한국민족의 독립의지' 표출이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김익상은 의거 후 법정에서도 자신의 의거가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위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밝혔고, 그렇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김익상은 조국광복을 눈앞에 두고 일본 경찰에 끌려가 종적이 묘연해지고 말았지만, 그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은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In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there was a peculiar stratagem called heroic struggle. It is to deliver the message of freedom and justice to human beings at the sacrifice of himself and clarify the great cause of a nation. Heroic struggle was not for his own wealth, honor and glory and it was not performed by his own ambition. It is a struggle form to realize justice in the world and the universal value of human beings in a broad sense, and to bring about a change in history and society, and to resolve the problem of a nation in a narrow sense. In the article, I examined Kim, Ik-sang's life and his heroic struggle, who was the model of such a stratagem in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Kim, Ik-sang grew up in a poor family and was not adequately educated. He worked at an ironworks and a tobacco company as an employee to make a living. But he didn't give up his dream to be a pilot ever since childhood. Furthermore, setting off in search of his dream, he met Kim, Won-bong, the leader of Euiyeoldan (an armed organization for national independence), and came to have the bigger dream, that is,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of his fatherland and national independence. Therefore he carried out a worthy undertaking to throw a bomb to the colonial Japanese Government in Korea without hesitation, and then he carried out a worthy undertaking in Huangputan, Shanghai.
His two undertakings were not performed successfully because he couldn't accomplish his initial purpose, however, his performance itself was a success regardless the success or failure of the undertakings. His worthy undertaking to throw a bomb to the colonial Japanese Government in Korea was to shoot back the Japanese propaganda that Korean people sympathized with Japanese cultural policy after the Samil Independence Movement. Meanwhile, as he dealt the heart of the colonial government a blow evading strict security, he gave thrilling feelings to the oppressed Korean people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and brought about another heroic struggle. Since then, the second and the third plan and performance of the large scale assassination and destruction would be bolstered by his worthy undertaking.
Furthermore, his undertaking in Huangputan, Shanghai served as a momentum to let Western countries like England and America as well as home and East Asian countries including China, Japan and others know Korean independence issue. Therefore, regardless the success and failure of his undertaking, it could deliver the message of Korean people's independence will, the real meaning of heroic struggle, all over the world.
Moreover, before the court he grandly expressed that his worthy undertaking was performed for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 of his fatherland and national independence. Therefore he did not fear death. In the end, he died for his country, however, his devotion to his country and to his people will live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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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0 | 학술지등록 | 한글명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외국어명 : JOURNAL OF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STUDIES | KCI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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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59 | 0.59 | 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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