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19세기 기호학계(畿湖學界)의 학설분화(學說分化)와 논쟁(論爭) = The Division and Controversy of Ki-ho School in the 19th century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0
작성언어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발행기관 URL
수록면
133-169(37쪽)
DOI식별코드
제공처
본고는 천주교가 전파되고 서양 자본주의 체제가 밀려오면서 19세기 기호 유학계가 어떻게 분화되고 논쟁을 전개해갔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이항로(李恒老)와 기정진(奇正鎭)의 주리설(主理說)은 천주교도의 확산을 막기 위해 행해진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한 시기에 성립되었다. 이항로와 기정진은 송시열(宋時烈)의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뜻을 계승하여 척사론(斥邪論)을 주장하면서, 천주(天主)가 만물을 주재한다고 하는 천주교에 맞서기 위해서 리(理)의 주재(主宰)를 강화하여 리유위(理有爲)의 관점에서 각각 명덕주리설(明德主理說)과 리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확립하였다.
이후 이항로와 기정진은 1866년에 각각 상소를 올려 서양문물을 배척하고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1870년대에 이르러서 문인 간에 상호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874년 최익현(崔益鉉)의 제주도 유배와 1881년 김평묵(金平黙)의 나주의 지도로의 유배, 1880년대에 노사학파의 민기식(閔機植)의 제천 이주 등으로 기정진의 학설이 이항로 학파에 전해지고 서로 교류하게 되었다. 이 두 학파는 이러한 동일한 주리론을 바탕으로 한말 위기상황 속에서 1896년과 1906년에 함께 의병운동을 일으켜 기호학계를 선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말에는 기정진의 학설을 둘러싸고 기호학계 내에 논쟁이 가열되었다. 송병선(宋秉璿) 등의 연재학파에서는 기정진의 「외필」이 이기(理氣)의 직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이이(李珥)를 비판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특히 송병선은 최익현이 지은 기정진의 신도비명이 동방 이학의 전통을 이이와 송시열(宋時烈) 등을 배제하고 주희 - 이항로, 기정진 등으로 이어가려고 한다고 비판하고, 최익현이 주장한 ‘척사명리(斥邪明理)’에 대해서도 ‘사(邪)’를 ‘기(氣)’로 해석하여 이이의 학설을 추종하는 기호계열의 학자들을 비난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또한 1902년 후반부터는 전우(田愚)와 송병순(宋秉珣) 등이 기정진의 학설에 대해 서로 토론하였다. 이들은 이이의 ‘리무위(理無爲)’의 관점에서 기정진의 학설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하였다. 다만, 이이의 ‘기자이 비유사지(機自爾非有使之)’에 대한 이해에서 송병선은 이기가 묘합되어 있다고 주장한 반면 전우는 기(氣)의 발동이라고 함으로써 차이를 노정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19세기 기호학계의 학설분화와 논쟁은 이항로와 기정진은 理의 작용성과 능력을 확대하여 서학의 神 개념에 맞서려고 한 것인데 비해, 전우와 송병선은 여전히 ‘리무위’의 이이의 학설을 고수하고자 한 것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his paper is about how Gi-Ho(畿湖) schools' Confucianism branched out and developed their arguments in the 19th century when Catholic and capitalism spread in Chosun.
Ju-Ri Philosophy(主理說) of two Confucian scholars, Lee Hang Ro(李恒老) and Gi Jung Jin(奇正鎭), was formed around the Gi Hae persecution(己亥迫害) that was intended to prevent the spread of Catholic. Following Song Si Yeol(宋時烈)'s idea of respecting Sinic civilization and excluding barbarians, Lee and Gi supported the policy of the expulsion of wickedness[斥邪] and established Bright Human Nature‘s Ju-Li(明德主理說) and Li-Yil-Li-Bun-Soo(理一理分殊). They assumed Li(理) is active because, if Li is nonactive, Li cannot match against the Western's God[天主」.
Later in 1866, Lee and Gi presented Byung-In-So(丙寅疏) in which they insisted the boycott against the Western culture, and in 1870, the students of the two schools started to interact with each other. Also, resulting from the moves of scholars, such as Choi Ik Hyun(崔益鉉)‘s exile to Je-ju Island in 1874 and Min Ki Sik(閔機植)'s move to Je-Cheon, Gi Jung Jin's theory was delivered to Lee Hang Ro's school. These two schools insisted that Lee's and Gi's ideas were consistent. Holding their common philosophy, Ju-ri, they attempted to raise the righteous army movement during the stormy times of late Chosun and lead their academic moves.
However, at the end of Chosun, there were heated arguments surrounding Gi Jeong Jin's theory among Gi-Ho scholars. Song Byeong Sun's School considered that Gi's 「Oi-Phil (猥筆)」 criticised Lee Yi(李珥) without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Li and Gi. Especially, Song thought that Choi Ik Hyeon, within his Shin-Do-Bi-Myung (神道碑銘 - a kind of epitaph), tried to prove that the tradition of Chosun New Confucianism was inherited by Lee Hang-ro and Gi Jeong Jin, instead of Lee Yi, Song Si Yeol.
In addition, in regard to 'the exclusion of the vicious and manifestation of principle[斥邪明理]', which was maintained by Choi, Song interpreted the vicious [邪] as Gi(氣), and believed that Choi criticized the Ki-ho pupils who sought the theory of Lee Yi ,
On the other hand, around 1902, the controversy over Gi Jeong Jin's theory started between Jeon Woo(田愚) and Song Byeong Sun. Assuming Li was nonactive, they insisted that Gi Jung Jin's theory was wrong. Concerning Lee Yi's theory that Gi(機) spontaneously moves but is not controlled by others [機自爾, 非有使之]', Song Byeong Soon thought that Li and Gi are combined, while Jeon Woo believed that it is the operation of Gi.
In conclusion, the division and the controversies were provoked by Gi-Ho Academy in the 19th century. Lee Hang Ro and Gi Jung Jin asserted that Li is absolutely superior to Gi trying to match against the Western's God by approving more influence to Li. However, Jeon Woo and Song Byeong Sun stuck to the point of view that Li is nonactive.
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