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 廣開土王의 遼東確保에 관한 新考察 = 廣開土王碑 ‘丁未年條’의 새로운 해석을 중심으로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5-52(48쪽)
DOI식별코드
제공처
廣開土王은 수 세기에 걸쳐 遼東確保를 염원해왔던 고구려인의 宿望을 실현시킨 군주였다. 요동 영토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西進政策에 따라 오랜 세월에 거쳐 점진적으로 확보되어 오다가 廣開土王代에 이르러 완전히 고구려의 領地가 되었다. 광개토왕의 부친 故國壞王은 385년 6월 遼東群ㆍ玄?郡을 기습 공격하여 이후 고구려가 力城ㆍ北豊 등 요동군의 일부 영역을 점유할 수 있었다. 고국양왕의 뒤를 이은 광개토왕은 396년 당시 최대의 宿敵이었던 백제에 대한 대규모 親征이 필요했으므로 後燕王 慕容寶의 冊封을 수력하여 후연과 平和關係를 유지했다. 그러나 광개토왕의 후연에 대한 朝貢은 모용보를 이은 慕容盛 집권기에서야 뒤늦게 이뤄졌다. 그것은 광개토왕이 후연의 내부정세를 정탐하고 400년 新羅救援戰爭으로 인한 요동방어선의 약화를 염려하여 후연과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정치 군사적 목적에 起因하였다.
이러한 형식적ㆍ일회적 ‘朝貢冊封關係’는 결국 400년에 파국을 맞이했다. 같은 해 2월 후연왕 모용성은 고구려왕의 예의가 오만하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고, 실제로는 고구려가 신라구원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틈을 타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新城과 南蘇城이 함락되는 등 일시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후연의 自中之亂을 활용하여 401년경 요동 전역을 차지한 광개토왕은 후연에 대한 반격전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402년에는 후연의 수도 龍城에서 가까운 宿軍城을 함락시켰고, 404년에는 大俊河 하류의 燕郡까지 공략하였다. 아울러 405~406년에 걸쳐 후연왕 慕容熙의 遼東城ㆍ木底城 침공을 효과적으로 격퇴함으로써 후연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광개토왕은 407년 초엽 遼西로 총퇴각하는 후연군을 괴멸하기 위한 전과확대 전쟁이 시급하였다. 그러한 내용은 「廣開土王碑文」 丁未年條의 ‘還破’ 앞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해 보았다. 반면 정미년조의 ‘환파’ 뒷부분은 백제의 6城을 攻破한 것임이 거의 확실하였다. 요컨대 407년 후연군에 대한 섬멸전은 광개토왕의 위대한 정복사업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후연에서 北燕으로의 정권 교체를 유발케 하였다. 그러므로 정미년조는 고구려가 東北亞의 覇者로 등극하는 순간을 特記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Gwanggaeto the Great(廣開土大王) was the lord that came true the dream of Koguryo(高句麗) people who had desired to secure Yodong(遼東) province during several centuries. Yodong province became a part of Koguryo territory in the rule of Gwanggaeto the Great. The father, King Gokukyang(故國壤王) made an assault on Yodonggun(遼東郡)ㆍHyuntogun(玄?郡) in 385. Owing to this successful military operation, Koguryo could take possession of Lyukseong(力城)ㆍBukpoong(北豊) which had existed as a main part of Yodonggun. Gwanggaeto the Great who succeeded to the throne, needed to go on an expedition in person against Baekje(百濟) in 396. Therefore, he accepted the installation of King Moyongbo(慕容寶) who ascended to the throne of Huyeon(後燕), for maintaining peace relations with Huyeon. But the tribute to Huyeon was accomplished belatedly in the rule of King Moyongseong(慕容盛) who was a child born of a concubine of King Moyongbo. The tribute to Huyeon was caused by following two objects. First, Gwanggaeto the Great wanted for Koguryo envoys to scout internal circumstances of Huyeon Court. Second, he longed for continuing peace relations with Huyeon, because his grand army went southward to relieve Silla(新羅) dynasty from invasion of foreign forces.
Between Koguryo and Huyeon, the installation-tribute relationship that seemed to be formal and unrealistic, was abrogated finally in 400. On February the same year, King Moyongseong plundered Koguryo in the name of Gwanggaeto the Great's rudeness. Actually his invasion made good use of the time that Koguryo grand army went southward to relieve Silla. In the war, Koguryo was put on the defensive for a time, losing Sinseong(新城) and Namsoseong(南蘇城). But after a while Gwanggaeto the Great easily could occupy the whole area of Yodong province in 401, because of utilizing internal strifes of Huyeon dynasty. He broke into war of revenge against Huyeon immediately. Koguryo army took a fortress, Sukgunseong(宿軍城) which was near by Huyeon's capital, Yongseong(龍城) in 402. Further more, they boldly attacked Yeongun(燕郡) which was located on the lower Daerungha(大凌河) in 404. In addition to this, Gwanggaeto the Great kept all out attack of King Moyonghee(慕容熙) in check at Yodongseong(遼東城) and Mokjurseong(大底城) during 405~406. As a result of triumph, Koguryo could hold military superiority over Huyeon.
At the last, Gwanggaeto the Great was urgent to extend military results against Huyeon army that having been made a general retreat into Yoseo(遼西) in 407. The preceding part in front of 'Hwanpa(還破)' in the Jeongminyeon(丁未年) article of Gwanggaeto the Great's inscription(廣開土大王碑文) is considered of containing this content. In short, the exterminatory war against Huyeon in 407 was a outstanding achievement of Gwanggaeto the Great. And the influence of the exterminatory war had replaced Huyeon dynasty with Bukyeon(北燕). Hence, the Jeongminyeon(丁未年) article connoted the historical meaning that it made special mention of the rise of Koguryo dynasty as a supreme ruler in the Northern Asia.
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