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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대일인식 = A Study on the Change of Understanding on Japan of Ahn Joong-Geun
저자
신운용 (한국외국어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5-44(40쪽)
KCI 피인용횟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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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안중근의 대일인식에 대한 학계의 논의는 대체로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긍정에서 부정으로 급변하였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중근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을 이토처단의 첫번째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안중근의 대일인식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필자는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안중근의 대일인식의 과정을 추적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러일전쟁 이전의 안중근의 대일인식을 이루는 핵심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안중근의 근거지인 청계동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안중근의 대일인식은 대일인식을 위정척사계열의 고능선과 반일의식을 공유한 아버지 안태훈의 그것과 연동되어 있었다. 또한 관례를 어기면서까지 명성황후시해사건을 공론화한 천주교의 대응도 안중근의 대일인식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안중근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주시하면서 천주교 전교와 천주교 교인의 억울한 송사를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대체로 명성황후시해사건을 견문한 막연한 적대의식이 이 시기의 안중근의 대일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안중근은 천황의 대러시아 선전조칙을 지지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러일간의 전쟁에 국한된 것이다. 안중근은 침략을 일삼지 않는 일본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중근이 천황의 조칙에 대해 완전히 매몰되어 일제의 침략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러일전쟁 이전 일제의 침략성을 인식하면서 러일전쟁의 결과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성이 드러나는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대해 안중근은 하야시를 제거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던 것이다. 이는 구국의 방법을 외교적 수단을 강구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무력투쟁을 도모하기 위한 해외이주 계획의 추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외교적 방법론을 통한 무력투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으므로 교육에 의한 구국의 방책을 시도하였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안중근의 대일인식은 이기ㆍ최익현의 그것과 같은 궤도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안중근의 대일인식이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크게 변하였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을사늑약 이후 안중근의 대일인식은 고종황제 폐위ㆍ한일신협약ㆍ군대해산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경험한 일제의 침략 즉, 국채보상운동 중 일본 순사와 충돌, 일제의 방해로 인한 삼합의 실패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안중근의 대일인식은 현 단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단계로의 전환을 가져온 추진력이 되었을 것이다.
국외망명 이후 안중근은 전단계의 대일인식의 한계성을 넘어 무력투쟁이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입각하여 일제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였다는 면에서 그의 대일인식은 한차원 높은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즉, 이 시기 안중근의 대일인식은 간도한인의 상황을 목격하면서 계몽적 운동단계에서 무력투쟁의 단계로 전환한 추진력이 되었다는 면에서 전시기와 확연히 구분된다.
무엇보다도 이 단계의 안중근은 천명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바탕으로 천황ㆍ이토를 비롯한 침략세력ㆍ민을 중심으로 한 평화세력으로 일본...
The aim of this paper is to argue on the time when Ahn Joong-Geun happened the change of his understanding on Japan.
Until now, academic circles seems to admit as an established theory that Ahn’s positive understanding on Japan was changed to negative sight around the Russo-Japanese wars. But his sight on Japan did not turn in period of the Russo-Japanese wars but changed profoundly as the extent of Japan’s aggression. Especially I focused that his negative recognition towards Japan was based on the case that Empress Myeongseong was murdered by japanese assassins.
Before the Russo-Japanese wars, observing Japan’s invasion, Ahn concentrated his effort on helping falsely accused missionaries and roman catholics. It can be said that his recognition towards Japan in this period was the vague hostility which he felt hearing the news about the Empress Myeongseong.
When the Russo-Japanese wars broke out, he supported japanese empire’s royal edict about the declaration of war towards Russia. But it was confined to only the wars. That is, he supported Japan that would not invade Joseon. Therefore it was not true that he wasn’t aware of the Japan’s aggression as he was cheated by japanese empire’s royal edict. On the contrary, recognizing Japan’s aggressive intention before the wars, he thought the result of wars with the negative point of view. So when Japan claimed the right for cultivating wild lands, he expressed his opposition against Japan’s invasion as killing Hayasi. It is followed by the project of emigration for an armed struggle in proper time considering diplomatic means as a method for saving his country. But actually it was impossible to achieve an armed struggle by diplomatic means. So he sought other method by education.
After Eulsa treaty, Ahn’s anti-japanese feeling was growing through japanese invasion,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and so on with the series of situations such as the dethronement of Emperor Gojong, Japan-Korea annexation treaty of 1907, dismissal of korean army. This change of his recognition on Japan could make him overcome the limit in that time and would bring him the impulse for turnover towards new direction.
After exile, Ahn transcended the limit of former his recognition on Japan. Therefore he ordained japanese imperialism as a target which had to be remove on the basis of concrete methodology of armed struggle and he carried his thought into practice. This fact showed that his recognition on Japan developed to the higher dimension. Thus, his recognition on Japan in this period differed from that in former period because it became a driving force for turning to the new stage from enlightenment movement towards armed struggle, observing the lives of koreans in Jiandao. First of all, it is necessary to take notice that he showed an analytical recognition on Japan which considered japanese including japanese empire and Ito as a invading force and korean people as a peaceful group. This fact is meaningful because he thoroughly thought that japanese was not a fellow who he had to compromise with but a opponent who had to be got rid of and korean people was a partner who had to cooperate with.
Ahn sometimes thought that his deed might have been wrong because of japanese kindness. But I thought that the sentence of death by japanese court convinced him what Japan’s true character was. Ahn tried to realize a mandate from Heaven, he believe, the korean independent and preservation of peace in East Asia by resistance against the japanese invasion towards Korea. In addition, he wished to finish his work, “On peace in East Asia”, as a last way with which he could have concretely practiced the mandate from Heaven. By doing such work, he emphasized that Japan was to be embraced for peace in Asia, God’s will.
분석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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