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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妓生’의 존재양상과 3ㆍ1운동 = The aspects of the existence of ‘Gisaeng(妓生)’ and 3ㆍ1movements in 1910s
저자
이동근 (수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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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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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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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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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166(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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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ditionally, there is Gisaeng system existed in Joseun Dynasty. Gisaeng is lower class people under the rigid caste system of Joseun Dynasty. They belonged to palace and government office and they were systematically educated for aristocrat ruling class. Although traditional Gisaeng is lower class people, they accomplished a lot. They did not only have artistic talent but also had high academic achievements. However, Japan’s colonial rule brought an abrupt change in the life of Gisaeng. In order to survive through the era, they were restricted under the competitive system and deliberately became a part of licensed prostitution system.
In February 21st 1919, when the Emperor Gojong passed away, people of Joseun Dynasty were in deep sorrow. Every day, hundreds of people gather not only in Deoksugung (palace) but also at the outside of Daehanmun (gate) and cried. Gisaeng were the ones who especially expressed the sorrow of losing the Emperor. As a resistance to oppressive colonial rule and dependent economic relationship with Japan, 3ㆍ1movements followed after the death of the emperor. All the people including farmers, workers, merchants, intellectuals, students and Gisaeng participated in 3ㆍ1movements and this movement spread all over the country. This movement was nationwide campaign for liberation of the people in Joseun and it is also a historical event that showed the joint power of the people that used to be considered as trivial.
During this historical event, Gisaeng, who were the part of the crowd, did not hesitate to hide their emotions for the country. For them, 3ㆍ1movements was the continuation of social movement of finding their identity as well as fierce competition to find their natural rights. The characteristic of 3ㆍ1movements by Gisaeng is group maneuver rather than individual actions. The Japanese Empire also recognized them as ‘Gisaeng gang’ or ‘Gisaeng independence group’. This shows that even after the hierarchal relationships of Gisaeng since Joseun dynasty had changed into Gisaeng union, the systematic bond still remained strong. Also, most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by Gisaeng had a connection with the movement that took a place in the regional marketplace. Gisaeng lead the crowd, added their vigor to the movement and they did not fear the arms of Japan.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는 기생제도가 존재했었다. 기생(妓生)은 조선사회의 신분제 틀 안에서 천민이었다. 이들은 궁궐과 관청에 소속된 관기(官妓)로서 양반 지배층을 위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전통적인 기생들은 비록 천한 신분이었으나 예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학문도 겸비한 다재다능한 존재였다. 하지만 식민지배는 기생들의 삶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식민지라는 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체제에 속박되어 일제의 의도적인 공창화 과정에 편입되어갔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임금이 돌아가시자 조선의 백성들은 모두 슬픔에 잠겼다. 덕수궁 내전은 물론 대한문 밖에서는 수백 명이 엎드려 매일같이 슬프게 통곡하였다. 이때 누구보다도 국부를 잃은 슬픔을 서럽게 토해낸 이들이 기생들이었다. 뒤이어 우리 민족은 일제의 강압적 식민 통치와 경제적 예속관계에 저항하며 3ㆍ1운동을 일으켰다. 3ㆍ1운동은 농민, 노동자, 상인, 지식인, 청년학생, 기생들까지 누구나 할 것 없이 동참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3ㆍ1운동은 거족적인 민족해방운동이었으며 동시에 보잘 것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민중들의 힘이 다시금 역사 속에서 하나로 뭉쳐 위력을 보였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 사건 속에 민중의 일원이었던 천한 기생들도 생존권의 바탕위에 민족적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기생들의 3ㆍ1운동은 식민지 통제하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사회운동의 연장선이자 치열한 생존권 투쟁이었다. 기생들의 3ㆍ1운동은 특징적으로 개별적 행동이 아닌 집단적 대응양상으로 나타났다. 일제도 그들을 ‘기생단’, ‘기생독립단’으로 집단화하여 파악하고 있다. 이는 관기적 입장에서부터 내려오던 기생들의 서열적 관계가 기생조합으로 변모하고서도 계속 유지되어 조직적인 틀이 강하게 존속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대부분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각 지역에서 장날 장터의 만세운동과 연계되어 나타났다. 기생들은 만세운동의 선두 대열에서 군중들을 이끌며, 누구보다도 힘차게 만세를 부르며 일제의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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