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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인의 초혼 연령 및 배우자의 신분 -현탁 가문과 김상순 가문의 사례- = The First Marriage Age and the Status of Marriage Partner of the Jungin(中人) Society in the Nineteenth Century -Cases of Tak Hyun(玄鐸)' and Sang-Sun Kim(金相淳)' Families-
저자
김두헌 (국제디지털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9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후보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45-183(39쪽)
KCI 피인용횟수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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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19th century the men and women in the families of Tak Hyun and Sang-Sun Kim got married at the age between 12 and 15 years old. Their average age of first marriage was 13.24 years old. This meant that early marriage prevailed, violating the regulations by which they couldn't get married under the age of 15 for men and 14 for women. The phenomena of early marriage prevailed for not only legitimate children but also children born of concubine. In most cases the age gaps between bride and groom was one or two years. The main purpose of early marriage was not to earn labor from the daughter- in-laws but to maintain or strengthen their social status.
The spouses in the families of Tak Hyun and Sang-Sun Kim were confirmed or assumed that they came from famous Jungin(the middle-class of Choson) families which were not small in numbers in Choson Dynasty. This suggested that marriages within the same class or early marriage were possibly in common in the society of Jungin in the 19th century. In the late Choson not only his main stock but also his maternal lineage and wife's family line was an important condition to decide his social position. These famous Jungin families accordingly monopolized technological jobs which were occupied by Jungin. After the Gabo Reform(甲午改革) of 1894 when the early marriage became illegal, the solidarity of Jungin began to dissolve.
As the consciousness of family tie was strong, marriages within the class or early marriage custom would be more throughly maintained. In the late 19th century through the fact that the early marriage custom prevailed among the Jungin society in Seoul, we can assume that the society of Yangban(the upper class of Choson) in Seoul also followed the custom. It is supposed that the age of first marriage of Jungin and Yangban children in Seoul was younger than the local areas such as Dangsung, northern Kyongsang province, and Daejeon. Since these interpretations, however, are only assumptions, there needs more solid and new documents to prove these problems.
19세기 현탁 가문과 김상순 가문 출신들과 그 배우자들은 조선시대 나이로 12세에서 15세 사이에 주로 초혼하였다. 평균 초혼 연령은 13.24세였다. 남자 15세, 여자 14세가 되어야 혼인할 수 있다는 법전의 규정을 벗어난 조혼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혼인 양상은 19세기 전 시기에 걸쳐 큰 변화 없이 진행되었다. 조혼은 적자녀들뿐만 아니라 서자녀들에게서도 이루어졌다. 신랑과 신부의 나이 차이는 거의 대부분은 한두 살 정도로 근소하게 났다. 이는 조혼의 주된 목적이 며느리의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것에 있지 않고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 또는 강화시키려는 데 있었음을 보여 준다.
현탁 가문과 김상순 가문 출신의 배우자들은 모두 신분이 중인으로 확인 또는 추정되었다. 이들이 소속된 가계 수는 적지 않았고 거의 대부분 명문 중인 가문들이었다. 이 사실은 신분 내 혼인이나 조혼이 19세기 중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신분을 결정하는 데 본가뿐만 아니라 외가나 처가의 혈통도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조혼을 시키는 부모가 가장 기본적으로 고려하는 조건은 배우자의 신분과 가문이었다. 중인 사회에서 유행한 조혼은 신분 내 혼인이나, 명문 중인 가문 출신끼리의 혼인을 조장하였고, 중인 사회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명문 중인 가문은 잡과와 주학 입격, 기술직 진출, 기술학 완천 등을 독점하여 갔다. 중인 사회의 결속이 해체되기 시작한 시점은 조혼이 법률적으로 폐지된 갑오개혁 이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벌 의식이 강할수록 신분 내 혼인이나 조혼의 풍습은 더욱 철저히 지켜졌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서울의 중인 사회에서 조혼이 유행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당시 서울의 양반 사회에서도 조혼이 유행하였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19세기 단성 지역이나 경상북도 북부와 충남 대전 지역보다 서울의 중인이나 양반 사회에서의 초혼 연령이 훨씬 낮았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언급된 예상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므로, 앞으로 새로운 자료들을 준비하여 실증해야 할 과제들이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6-02-26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The History of Seoul -> Seoul and History | KCI등재 |
2016-02-03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鄕土서울 -> 서울과 역사외국어명 : The Hyangto Seoul -> The History of Seoul | KCI등재 |
2015-10-22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 서울역사편찬원영문명 : The City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Of Seoul ->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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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27 | 0.27 | 0.34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35 | 0.33 | 1.024 | 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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