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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선산의 동학조직과 활동 = Study on the Donghak of the Organization and Activities of the Gumi Seon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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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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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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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18(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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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on the Donghak of the organization and activities of the Gumi seonsan
Yu-Lim after the story was the Donghak of oppression windows which positively increased the forces that gradually tuned to the Donghak. This phenomenon was particularly noticeable in the Youngnam Province. Yangbancheung of Youngnam Yu-Lim was even Donghak farmers revolutionary at the time to lead the Donghak nongmingun be a leader is of course that is directly involved in the revolution. Could this be why Yu-Lim forces stood in the forefront of repression that the initial contact with the Donghak. The reason is that this idea was consistent with the Donghak and governance in many parts of Confucian ideology of the time. Above all, it was because the Donghak will agree with the logic similar to Wejung-cheoksaron who constitute the mainstream of the time abroad. Confucius would have a crane was skeptical intellectuals such obvious limitations and academic status tubes stay in the armchair positive response to this. Especially those who fall away from Youngnam yangbancheung way of success approach would have been recognized with the same people.
Gumi seonsan area is a popular area with a lot of talent from example. Donghak farmers at the time of the revolution in 1894 was also attended by a lot of talent in this area. But there is no record of the Donghak of leadership came to the area. Neighbors, the region has recorded Gimcheon Haewoel Choesihyeong have visited several times. In particular Naechik and Naesudomoon published by the Bock-ho- dong Gimcheon was the scriptures that represents the spirit of respect for life Donghak. It is the first Gumi seonsan area appears on the Donghak was recorded in 1893 when the bo-eunjibhoe. There is evidence of the Gyeongsang region has also participated in many Donghak Gumi seonsan region. In bo-eunjibhoe to be responsible for the carriage six Po included Gyeongsang region to play a Gumi seonsan region was chunggyeong-Po, seonsan-Po. 1894 Donghak farmers revolutionary chunggyeong-Po, seonsan-Po and Yangbancheung moved by a very organized at the time of deployment. He had occupied the castle after Seonsan occupied the town Gimcheon planned to attack the Haepyeong with the Japanese logistical base. But the Japanese had grown down to pre-emptive strike in advance. A number of victims occurred. But Donghak farmers revolutionary in the Gumi seonsan this area is becoming a wildfire unquenchable spirit still illuminate the area.
동학이 창도된 이후 이를 적극적으로 탄압하던 유림층에서는 차츰 동학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났다. 이러한 현상은 특별히 영남지방에서 두드러졌다. 영남 유림의 양반층은 심지어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혁명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물론 지도자가 되어서 동학농민군을 이끌기 까지 했다. 왜 초기에 그렇게 탄압에 앞장섰던 유림세력이 동학에 밀착될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동학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 당시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과 많은 부분에서 합치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동학은 당시 유학의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위정척사론과 흡사한 논리에 동감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성리학이 가지는 명백한 신분적 한계 내지는 탁상공론에 머무는 학문관 등에 회의적이었던 지식층이 이에 적극 호응하였을 것이다. 특히 벼슬길에서 멀어진 이른바 몰락한 영남 양반층에게는 민중들과 똑같은 인식으로 접근되었을 것이다.
구미 선산지역은 예부터 인재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이 지역의 많은 인재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동학의 지도부가 이 지역에 왔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이웃인 김천 지역에는 해월 최시형이 몇 차례 방문한 기록이 있다. 특히 김천의 복호동에서 발표한 내칙과 내수도문은 동학의 생명 존중 사상을 대표하는 경전이 되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해월 최시형이 구미 선산지역을 방문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아직까지는 어떤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구미 선산지역이 동학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것은 1893년 보은집회 때 였다. 당시 경상도 지역의 많은 포가 참여하는 가운데 구미 선산지역의 많은 동학도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보은 집회에서는 경상도 지역을 담당할 포로 6개 포가 임명되었다. 그 중에서 구미 선산지역을 담당할 포는 충경포와 선산포였다. 구미 선산지역의 동학도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될 당시 충경포의 편보언과 선산포의 신두문 그리고 많은 양반 출신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이들은 김천읍을 점령한 뒤 선산읍성을 점령하였고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는 해평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감지한 일본군의 선제 공격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미 선산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꺼지지 않는 들불이 되어 지금도 이 지역을 밝히는 정신이 되고 있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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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12-23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Journal of Donghak Studies ->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 KCI후보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0.7 | 0.7 | 0.62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8 | 0.55 | 0.797 | 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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