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호서기정(湖西紀征)』에 실린 화양구곡시(華陽九曲詩)에 대한 고찰(考察) = A Study(考察) on Huayanggugok Poems(華陽九曲詩) in 『Hoseogijeong 湖西紀征』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7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193-231(39쪽)
DOI식별코드
제공처
孔聖學(1879~1957)과 그 동료 4명은 일제강점시대인 1937년 화양구곡 속리산 부여 등 호서지방을 기행하고 <湖西紀征>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공성학은 고려유민의 후손이며 개성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컸다. 林河永과 공성학 등은 고려말 두문동 72인에 제사를 지내고 尊周大義와 충절을 선양하기 위해 개성에 두문동서원을 창건했다. 또 <두문동서원지>를 간행했다.
부여 출신인 林河永은 7년 동간 위의 두 가지 두문동사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고향 扶餘로 돌아가는 임하영을 전송하기 위해 華陽洞과 俗離山 그리고 白馬江을 함께 여행했다. 이들이 杜門洞書院을 완공한 후, 그 노고와 환희에 대한 自慰 自祝, 그리고 고향 부여로 돌아가는 임하영을 편안히 귀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함께 여행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존주대의의식의 건축조형적 실천으로는 개성에 두문동서원을 창건했다. 시문학적으로는 화양구곡에 대해 지은 시와 「華陽九曲吟」를 통해 표출했다. 그리하여 두문동서원에서는 충절을 지킨 선현들을 참배하면서 그 의지를 견강히 했다. 화양구곡은 우암 송시열이 존주대의를 성지화한 명소였기에 탐방순례하여 그 의지를 견강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껏 1인이 독자적으로 화양구곡시를 지은 사례는 있으나 2인 이상 동행한 사람들이 모두 화양구곡시를 지은 사례는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다. 이도 주목할 사항이다.
조선 땅에서 도학의 연원을 계승하고 춘추대의정신이 극명하게 표상화된 곳이 화양동이었다. 이렇듯 이들은 개성의 두문동과 충북의 화양동 두 곳을 존주대의 충절을 선양 보존한 대등한 성지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화양동을 탐방하고 그 의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이런 그들의 의식을 화양구곡을 읊은 시에 담았다. 첫째 杜門洞書院完工 自祝과 화양구곡기행에 대한 기대감, 둘째 화양구곡 道學 淵源과 그 계승의 현장으로 인식, 셋째 효종의 승하와 再造藩邦에 대한 想念 등이다. 이렇게 이들은 일제강점기 그들의 존주대의의식을 표출했다. 이들은 그런 의식을 문학을 통해 확산하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5명이 지은 화양구곡시는 그 정경을 아름다운 시어와 비유법, 반어법을 사용하여 문예적 수준도 양호한 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시기 개별적으로 화양구곡에 대한 지은 시에 견줄 수 있다.
이민응의 「展拜尤菴宋先生」 3~4구를 보자. 대개의 경우 명나라 神宗의 글씨 ‘非禮不動’, 毅宗의 글씨 ‘玉藻氷壺’를 원용해서 재조번방의 공에 대해 존모의 뜻을 표했다. 이민응은 선조의 글씨 “萬折必東”를 원용해서, 우암이 존주대의를 聖地化한 사실을 표현했다. 이점도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湖西紀征>에 실린 華陽九曲에 대하여 지은 詩는, 일제강점기에 존주대의의식을 시에 표출한 시로, 그 시대적 구곡문학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Gong, Seonghak(孔聖學) and his companions 4 members had tripped to Hoseo district such as Songnisan, Buyeo and so on whe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1937 and then had written book of Hoseogijeong(<湖西紀征>). Seonghak(孔聖學) had big pride of descendant of Goryeo refugee and he came from Gaeseong. Im, Hayeong(林河永) and Gong, Seonghak(孔聖學) and so on, they had served sacrifice for late Goryeo Dumundong 72 people. They had found Dumundong private school in Gaeseong in order to enhance Jonjudaeui(尊周大義) and loyalty. And they had published < Dumundongseowonji >. Im, Hayeong(林河永) from Buyeo, he had finished Dumundong Project of two types for 7 years and came back his hometown. They tripped Huayangdong(華陽洞) and Songnisan(俗離山) and Baekma river(白馬江) in order to see off Im, Hayeong who came back his hometown Buyeo(扶餘). We can know that they tripped together in order to Im' Hayeong's homecoming safety his hometown Buyeo after these people had finished Dumundongseowon(杜門洞書院) and then they had self-consolation(自慰) and celebration by themselves(自祝,) about their efforts and jubilation.
There are so many meaningful it was fact that these people inquiried and composed Huayanggugok poems. At first, these people founded Dumundong private school in Gaeseong as a practice of building moulding in sense of Jonjudaeui(尊周大義). In the poetic literary, they expressed through the poems of Huayanggugok and 「Huayanggugokeum華陽九曲吟」. Thus, in the Dumundong private school, they tributed their ancient sages who kept loyalty and they would strengthen their will. They intended to strengthen their will by inquirying pilgrimage of Huayanggugok which was attraction of sacred place of Jonjudaeui(尊周大義) by Uam Song, Siyeol. Second, all this time there is not the case of over 2 people accompanied compose Huayanggugok poems at all but there is a case of 1 person composes uniquely the Huayanggugok poems. This is a notable point. Third, they imitated Juja(朱子)'s 「Muidoga」, poetic form such as Gugok poetry but they did not follow the rhyme(韻). Fourth,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se people had written Chunchudaeui(春秋大義) in Huayanggugok poems after tripped in Huayanggugok.
Foundation purpose of Dumundong private school is to deny the Joseon Yeokseonghyeokmyeong(易姓革命) in the late Goryeo period and to enhance the 72 people who hidden dwell in Dumundong and whose Dohakyeonwon(道學淵源),Chunchudaeui(春秋大義), and further Chunghyojeolui(忠孝節義). In the land of Joseon Dynasty , it was Huayangdong which was scrupulous representational place of Chunchudaeui(春秋大義) spirit and succeeded to Dohakyeonwon(道學淵源). Like this, they recognized two equal sacred places which were raised and preserved of Jonjudaeui(尊周大義) loyalty such as Dumundong in Gaeseong and Huayangdong in Chungbuk. So they inquiried Huayangdong and intended to make secure their will. They expressed their these senses into Huayanggugok poems. First, Dumundongseowon completion celebration by themselves and anticipation feeling of Huayanggugok travelog, Second, Huayanggugok, Dohakyeonwon and the recognition of succession site. Third, Hyojong King's Demise(孝宗의 昇遐) and an idea of Jaejobeonbang(再造藩邦)and so on. Like these, these people had expressed their Jonjudaeui sens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se people can be about to spread through the literature by their sense. These 5 members had composed Huayanggugok poems. They can be evaluated literary level of good by use the beautiful poetic language of the sense, the metaphor. Therefore the period of individually I can compare the poems of composing Huayanggugok.
Let's see Lee, Mineung's 「Jeonbaeuamsongsensaeng展拜尤菴宋先生」 3~4 stanzas. In the case of most, Myeong country Sinjong(神宗)'s letter, ‘Biryebudong(非禮不動)’, Uijong(毅宗)'s letter ‘Okjobingho(玉藻氷壺’) quoted and expressed the meaning of Jonmo(尊慕) about exertion of Jaejobeonbang(再造蕃邦). Lee, Mineung quoted King Seonjo's letter “Manjeolpildong(萬折必東)”, and he expressed the fact of making sacred places in Uam's Jonjudaeui(尊周大義). This point can be given difference.
As the above examining, it can be given contemporary Gugok-literary meaning in Huayanggugok poems(華陽九曲詩) which expressed sense of Jonjudaeui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Hoseogijeong (<湖西紀征>).
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