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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 서울 양반과 빈곤의 문제-도저동 金履中 家를 중심으로- = The Poor Gentry in Seoul and the Problem of Poverty in the Late 18th Century-Focusing on the Kim Yi-jung family who lived in Dojeo-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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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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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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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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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9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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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trace the life and family line of Kim Yi-jung, a gentry who lived in Seoul in the late 18th century. Through this work, I intend to analyze in detail the problems faced by the gentry class of the poor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basic data of this paper is Heumyeong, the diary of Yu Man-ju, Kim Yi-jung's maternal cousin.
Kim Yi-jung is a member of the Andong Kim Clan, an influential family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is the 6th generation descendant of Kim Sang-yong. The direct descendants of Kim Sang-yong, who lived in Seoul, went through the Second Manchu Invasion of Korea and found a new basis for life in Odu-ri and Deoksan-hyeon, Chungcheong-do. This lineage has been settled in Odu-ri since the time of Kim Seong-dal, the great-grandfather of Kim Yi-jung. Since Kim Seong-dal's fifth son, Kim Si-jeong, was adopted by his uncle and moved to Deoksan-hyeon, Kim Yi-jung's ancestors showed signs of declining as poor Chungcheong-do gentry. When Kim Si-jeong's second son, Kim Yeo-haeng, died at the age of 32, the bereaved family, his wife and his two sons, had no way to make ends meet. So, the three families went to Seoul to live by relying on Mrs. Yu's younger brother Yu Han-Jun. Shortly after, when Mrs. Yu died, the completely orphaned brothers became completely dependent on their uncle Yu Han-jun, and they were unable to stand on their own financially.
Kim Yi-jung got married and became the head of the household with two sons and three daughters. For the 13 years recorded in Heumyeong, the Kim family lived in Dunggeujae outside Seodaemun, Hwakgyo-dong in Yongsan, and Dojeo-dong outside Namdaemun. The fact that this family's residence was always outside the four gates of Seoul shows their poor socio-economic situation. The family's poverty is also related to frequent illnesses: two of Kim Yi-jung's children suffered from the measles epidemic in Seoul in 1786, and one died around the same time. Kim Yi-jung suffered from a disease and died in his late 40s. Yu Man-ju, who observed the lives of poor noblemen, including Kim Yi-jung, came to the conclusion that poverty is like a death sentence for the gentry in Joseon. The fact that the eldest son Kim Baek-sun was executed as a Catholic in 1801, 15 years after the death of Kim Yi-jung, is judged to be the result of following the path of poverty inherited from his father.
본고에서는 18세기 후반의 서울에 거주한 金履中(1740~1787)의 생애와 가계를 추적해 조선후기 양반이 직면한 빈곤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김이중의 외사촌동생인 兪晩柱의 일기 欽英의 기록을 기초 자료로 삼았다.
김이중은 조선후기 노론계의 유력한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안동김씨의 구성원으로 淸風溪 주인 金尙容의 6대손이다. 서울에 세거하던 김상용의 직계 후손들은 병자호란을 겪으며 충청도 오두리와 덕산현 등지에서 새로운 생활의 기반을 찾았고, 김이중의 증조부인 金盛達의 대에 이르러 오두리에 정착하게 된다. 김성달의 5남 金時淨이 백부에게 입양되어 삶의 터전을 덕산현으로 옮긴 이래 김이중의 先代는 가난한 충청도 양반으로 몰락할 조짐을 보였다. 이후 김시정의 차남 金礪行이 32세로 사망하자 유가족인 그 아내 杞溪俞氏와 두 아들 김이중 및 金履弘은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었다. 이에 기계유씨의 친정에 의지하여 살아가기 위해 세 모자는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얼마 후 기계유씨가 사망하자 완전히 고아가 된 김이중 형제는 전적으로 외삼촌 俞漢雋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그들은 끝내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했다.
김이중은 龍仁李氏와 혼인하여 2남 3녀를 둔 가장이 되었고, 흠영에 기록된 13년간 그의 가족은 서대문 밖 둥그재와 용산 확교동, 남대문 밖 도저동 등지에 거주했다. 이 가족의 주거지가 늘 도성 밖에 있었다는 점은 그들의 열악한 사회경제적 처지를 보여준다. 또한 이 가족의 빈곤은 잦은 질병과도 관련을 갖는데, 김이중의 자녀 중 2명은 1786년 서울에 유행한 홍역을 앓았으며, 1명은 그 시기에 사망했다. 또한 김이중은 질병에 시달리다 40대 후반에 사망했다. 김이중을 포함한 가난한 양반의 삶을 지켜본 유만주는 조선의 양반에게 가난이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이중 사후 15년 된 1801년 그 장남 金伯淳이 천주교도로서 처형된 것은, 부친으로부터 계승된 가난의 경로를 따른 귀결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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