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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권환의 공백기에 대한 고찰– 감옥살이부터 박간농장(迫間農場) 생활을 중심으로 – = A review of poet Kwon Hwan's suspension of activities- From prison life to life at a Bakgan farm -
저자
이홍숙 (창원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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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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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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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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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526(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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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is well known, there is a break in Kwon Hwan's activities. In addition to arrest on June 20, 1934, the retirement period of Bakgan Farm on January 9, 1939 is the period. This period can be largely divided into two periods. One is the period of imprisonment due to arrest, and the other is the period of life at a night farm after discharge. Kwon Hwan's participation in ≪New Construction≫ was the direct cause of prison life. Kwon Hwan, who had been active, including KAPF activities, reported in Chosun Ilbo on June 23, 1934 that new construction executives of left-wing theater companies were arrested on June 21, and that Kwon Hwan's father was searched on July 1 of the same year and sent to Jeonju Law.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Kwon Hwan's hiatus began on June 20, 1934. And on December 9, 1935, after going through the trial process, he was sentenced to one year and eight months in prison and two years of probation. Kwon Hwan returns to his hometown of Oseo-ri, Jinjeon-myeon, Changwon-gun, Gyeongsangnam-do on December 30, 1935. He then went to Jinyoung in Gimhae-gun, Gyeongsangnam-do on January 4, 1936, visited his father on January 5, and returned to Jinyoung Farm immediately. Kwon Hwan's trip to the camp does not seem to have gone to his sister's house to heal, but to have gotten a job at a Bakgan farm. It can be said that it originated from the long-standing friendship between his father Kwon Oh-bong and farm manager Kim Kyung-jin, and it is understood that Kwon Hwan had promised each other before coming down to his hometown. Kwon Hwan goes back to Bakgan Farm in Garak-myeon, Gimhae-gun on July 9, 1936. From here, on January 9, 1939, he retired from Parkgan Farm and immediately went to Seoul. This is Kwon Hwan's break. It is summarized that the period of probation after release was spent on a night farm. The above facts are summarized based on the facts recorded in the diary of his father, Kwon Oh-bong. It can be summarized that Kwon Hwan, who went to Seoul after the hiatus, got a job at Chosun Ilbo. This is because in the father's diary, there is a content in which the father goes to Seoul and calls the Chosun Ilbo to meet his son to check whether he is leaving work or not. This is also supported by the fact that Kim Kyung-jin, a powerful man at the time, will also go to Seoul to meet Kwon Hwan shortly after Kwon Hwan's coming to Seoul. On August 25, 1940, his father's diary that he received a letter from Gyeongwan that he had a job at Kyungsung Imperial University is summarized as a post-retirement course of Chosun Ilbo.
Kwon Hwan summarized that during the break, the trip to the Parkgan Farm was absolutely carried out in his relationship with his father. It was found that he spent the probation period in charge of the management position of the Bakgan Farm, relying on his father's connections.
시인 권환의 활동에는 공백기가 존재한다. 1934년 6월 20일 검거를 비롯해서 1939년 1월 9일 박간농장의 퇴직 기간까지가 그 기간이다. 이 기간은 크게 두 시기로 분리해서 설명할 수가 있다. 하나는 검거로 인한 옥중수형기간이고 하나는 출옥 후 박간농장에서의 생활기간이다.
옥중생활은 권환의 ≪新建設≫ 가담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카프활동을 비롯해 왕성한 활동을 해 오던 권환은 1934년 6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지난 21일 좌익극단 신건설 간부들이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있고 권환의 아버지가 쓴 ≪성재일기≫의 같은 해 7월 1일자일기에는 6월 20일 수색을 당하고 전주지법으로 압송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권환의 공백기의 시작은 1934년 6월 20일 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재판과정을 거쳐서 1935년 12월 9일 징역 1년 8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출옥한다.
권환은 1935년 12월 30일 고향 경남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어 1936년 1월 4일 경남 김해군 진영으로 갔다가 1월 5일 아버지를 찾아뵙고 진영으로 곧 바로 진영농장으로 돌아간다. 권환이 진영으로 간 것은 누이동생 집으로 요양을 하러 간 것이 아니라 박간농장에 취직을 하여 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버지 권오봉과 농장관리자인 김경진과의 친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권환이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에 서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 된다. 권환은 진영의 박간농장을 거쳐 다시 1936년 7월 9일 김해군 가락면의 박간농장으로 간다. 그리고 1939년 1월 9일 박간농장을 퇴직하고 곧바로 서울로 간다. 여기까지가 권환의 공백기다. 출소 이후의 공백기는 집행유예기간을 박간농장에서 보낸 것으로 정리된다. 이상의 사실은 아버지 권오봉의 일기에 기록된 사실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공백기 이후 서울로 간 권환은 ≪조선일보사≫에 취직을 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일기에 아버지가 서울에 가서 아들에 만나기 위해 ≪조선일보사≫에 전화를 하여 퇴근 여부를 확인하거나 만나는 내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권환의 상경직후 당시의 권력자 김경진도 서울로 가서 권환을 만난다는 내용도 이를 뒷받침한다. 1940년 8월 25일자 ≪경성제국대학≫에 취직했다는 경완의 편지를 받았다는 아버지의 일기는 ≪조선일보≫ 퇴직 이후의 과정으로 정리 된다.
권환의 공백기의 행적 중 박간농장 행은 절대적으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진행된 것으로 정리했다. 아버지의 인맥에 기대어 집행유예기간을 박간농장의 관리직을 맡아서 보낸 것으로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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