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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독립운동의 연관성- 충남지역 동학농민군 분석을 통해 = The relationship between revolution and independence movement
저자
정을경 ((재)충청남도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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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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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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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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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316(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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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자료에 의해 당시 동학 교인수는 70~80만여 명으로 추 산된다. 그러나 이 중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충남 출신 교인의 명부는 2015년에 교단에서 발간한 『동학천도교인명사전』과 부여, 예산, 서산, 논산에 남아 있는 교인 명단이 전부이다. 즉, 당시 추산되는 교인의 1/10에 해당되는 수치의 교인만이 파악될 뿐이다. 이 명단을 통해 충 남 출신을 선별하면, 충남 출신 동학 교인은 2,237명으로 확인된다. 또한 이 중 동학농민혁명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교인은 36.4%의 비율인 816명이다. 현재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등록된 동 학농민혁명 참여자는 3,644명이며, 이 중 호남지역 참여자는 2,043명, 충청지역 참여자는 1,103명, 충남 출신 참여자는 816명이다.
출신지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교인을 제외하고 충남지역 동학교 인의 출신 지역은 서산시가 17.1%로 가장 높았으며, 그 다음으로 당 진, 논산, 예산, 공주가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 서산지역은 서산관아를 공격하여 농민군 지도자 30여명을 구출하였으며, 관아와 관속들의 집 에 불을 지르는 등 동학농민혁명이 치열하게 전개된 지역이었다. 또한 동학농민군 참여가 높았던 당진, 논산, 예산, 공주 모두 충남에서 동학의 교세가 강성했으며, 동학농민혁명에서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서 동학교인의 비율과 참여도는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충남 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총 2,237명 중 동학농민혁 명 참여 이후 천도교단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선별하기 위해, 동학농민 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총살, 화형, 행방불명 등을 당해 이후의 삶을 지 속할 수 없었던 인물 405명을 제외하였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 던 1,832명 중 동학농민혁명 이후 천도교단에서 활동한 내역이 확인되 는 인물은 총 67명으로 확인되었다. 즉,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중 3.67%가 천도교단에서 일정한 직책을 맡아 활동을 한 것이다. 이 비율 은 수치적으로만 판단하여 낮은 수치라고 말할 수 없다. 동학을 종교 로 믿고 혁명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농민군도 있었을 것이고, 동학농민 혁명에 참여했던 농민군이 천도교단에서 일정한 직책을 맡지 않고 일 반 교인으로 활동하여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수치는 목숨을 잃을 뻔한 혁명에 참여하였던 농민군이 또다 시 교단에 믿음을 갖고 그 종교가 추구하는 독립운동과 활동에 함께 했 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는 수치이다.
67명 중 접주 등의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농민군은 24명이었으 며, 충남지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여러 차례 참여한 농민군도 18명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또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의 농민군은 내포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67명 중 천도교단에서 뚜렷한 직책을 맡지 않았던 인물은 13명이 전부이다. 즉, 80%가 넘는 인물들이 교단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 있었다. 동학농 민혁명에서 지휘력을 갖고 농민군을 진두지휘한 위치에 있던 동학농민 군은 천도교단에서도 중요 직책을 맡았던 것이다. 즉, 동학 내에서의 위치와 참여도가 천도교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67명 중 4명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와 함께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던 내역이 확인된다. 박인호는 천도교 제4세 교주로, 충남 일 대를 돌면서 포덕활동을 펼쳐 충남의 동학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
The number of Donghak (Eastern Learning) believers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s estimated to be 700,000 to 800,000 persons. However, the registers of the believers from Chungnam who can be identified now are just found from 『Biographic Dictionary of Donghak Believers』 published by the religious body in 2015 and the lists of the believers left in Buyeo, Yesan, Seosan, and Nonsan. That is, the believers who are applicable to 1/10 of the then estimated believers are just identified. Selecting the believers from Chungnam in these lists of names, the Donghak believers from Chungnam have found to be 2,237 persons. And among them, the believers who directly participate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re 816 people, the rate of 36.4%. Now, the participants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registered in the National Commission o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re 3,644 people and among them, the participants in Honam are 2,043 people, the participants in Chungcheong are 1,103 people, the participants from Chungnam are 816 people.
Execpt the believers whose their hometowns were not clearly identified, hometowns of Donghak believers in Chungnam have found that Seosan is highest as 17.1%, followed by Dangjin, Nonsan, Yesan, and Gongju. In Seosan, more than 30 leaders of the peasant army were rescued by attacking Seosan Government Office an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cluding setting fire to the government office and the government officials’ houses were fiercely developed in it. And Donghak’s religious influence were powerful in All the Chungnam areas including Dangjin, Nonsan, Yesan, and Gongju where a lot of Donghak peasant armies participate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the Donghak believers’ rate and participation has a great correlation with Seosan in that there were important battles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order to select people who were active in the Religious Body of the Heavenly Way after participating in the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mong the total 2,237 people from Chungnam who participate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405 people who could not live because of being shot dead, being burnt at the stake, or being missing after participating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ere ruled out. Then, the people who were active in the Religious Body of the Heavenly Way in the details among the total 1,832 people who participate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have found to be total 67 people. That is, 3.67% of the participants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ere active in the Religious Body of the Heavenly Way assuming positions. This rate is not low by judging the numerical value. There were the peasant armies that did not participate in the revolution even though they believed in Donghak and there were the cases that the peasants who participated in it were not recorded because of being active as the general believers without positions of the Religious Body of the Heavenly Way. Therefore, the numerical value is very meaningful in that the peasants who had participated in the revolution and had almost lost their life again were active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activities sought by the religion trusting in the religious body.
As the peasants who were leaders including Jeopju among 67 people were 24 people and the peasants who participate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Chungnam several times were 18 people, they have the high rates. And over half of the peasants among them were characterized by participating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Naepo. The people who did not have positions in the Religious Body of the Heavenly Way among 67 people were just 13 people. That is, more than 80% of them had important positions in the religious body. The Donghak Peasant Army that led the peasant armies with the ability to comman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had also important positions in the Religious Body of the Heavenly Way. That is, posi...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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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12-23 | 학술지명변경 | 외국어명 : Journal of Donghak Studies -> The 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8-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7-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2차) | KCI후보 |
2006-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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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7 | 0.7 | 0.62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58 | 0.55 | 0.797 | 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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