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中宗代 文廟從祀 論議와 朝鮮 道統의 形成
저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07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39-76(38쪽)
KCI 피인용횟수
21
제공처
소장기관
조선 중종대의 정몽주-김굉필의 문묘종사 논의는 주자학 도통론의 사상적 영향 아래 진행되었다. 중종 5년과 9년에 건의된 정몽주의 문묘종사 주장은 중종 12년부터는 정몽주와 김굉필을 함께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주자학 도통론의 강력한 영향 아래 조선 도학의 정통이 정몽주로부터 김굉필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도학 정통의 수립과 병행하여 추진되었다.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지던 도학의 정통은 그 뒤 끊어지고 말았는데, 그것을 송대의 주돈이가 이어 주희에까지 계승되었다는 것이 주자학 도통론의 내용이었다. 이러한 이념의 영향으로 이 시기 조선에서는 고려말 정몽주가 도학의 정통을 중국으로부터 이어받았으며 그것이 김굉필에게로 전해졌다는 내용의 도학 계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계보의 형성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몽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조선왕조 건국자들과의 정치투쟁 과정에서 죽음을 당했던 정몽주는 조선 건국 직후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곧 태종에 의해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으로 받들어졌고, 그러한 평가는 대대로 국왕들에 의해 유지되고 강화되었다. 그것은 정몽주에게서 왕조의 흥망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절대적 충신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몽주를 조선 도통의 선구로 보는 유학자들은 ‘동방이학의 선조’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그리하여 그를 도학 계보의 시작점에 자리매김하였던 것이다. 과거 국왕들에 의해 구축되었던 정몽주의 명성은 그러한 이미지를 국가적으로 공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동력으로 기능하였다.
정몽주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정몽주-김굉필의 도학 계보 형성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중종대의 사림 세력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세조대와 연산군대의 역사를 보는 관점을 다시 세우고 과거의 결정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넘어, 도통론이라는 보편적인 이론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이 도학의 적통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중종대의 문묘종사 논의는 정몽주만 문묘에 종사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따라서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여 조광조와 연결하려던 사림 세력의 의도는 현실정치에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정몽주의 문묘종사는 도학의 계승자가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문묘에 종사된 것이다. 이는 도통론이 조선의 이념적 지향을 결정하는 담론으로 기능할 수 있는 단초를 열었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The Daoton Doctrine of Zhuixue had influenced debates on enshrinement of Jeong Mong-ju and Kim Geong-pil in Munmyo (Confucius's Shrine) during Jungjong era. The claim for the enshrinement of Jeong made in 1510 and 1514 was expanded into the one including Kim in 1517. The movement for co-enshrinement can be juxtaposed with the formation of legitimate succession from Jeong Mong-ju to Kim Geong-pil. According to the Daotong doctrine, the legitimate transmission of Confucius's philosophy was discontinued after Mencius. Later, however, Chow in northern Sung restored the tradition and Zhuixue took over. The Sarim of Joseon Dynasty adopted this ground and argued that Jeong in Koryo dynasty inherited the legitimate authority from China and handed it down over to Kim.
While forming the transmission, the image of Jeong was changed. Because Jeong was executed by the founders of Joseon dynasty, the government imposed negative image of Jeong. Soon, however, he carne to be admired by king Taejongand succeeding kings of Joseondue to the fact that he was loyal to Koryo Dynasty until his death. Additionally, the Confucian scholars who strived for the enshrinement of Jeong added the image as 'the pioneer of Korean Dohak' and placed him as the first one to legitimately transmit the Dohak in Joseon Dynasty. The accumulated reputation of Jeong Mong-ju by the past kings played a major role in officially proving the established image.
Sarim party under the reign of Jungjong changed the image of Jeong Mong-ju and formed the connection between Jeong and Kim, as a part of their efforts to obtain political and ideological authority. Throughthese efforts, they tried notonly to build a new prospect which explained the history of the reign of King Sejo and King Yeonsan and to rectify false decisions, but also to use the Daotong doctrine as a universal concept to construct their ideological authority. Kim, the teacher of Jo Gwang-jo was promoted as the legitimate transmitter of Joseon Dohak.
Debates on enshrinement of Jeong Mong-ju and Kim Geong-pil in Munmyo (Confucius's Shrine) were concluded by enshrining Jeong Mong-ju only. Therefore, Sarim's attempt to enshrine Kim and connect him to Jo looks like a failure. However, Jeong was enshrined as a legitimate transmitter of Dohak, which meant the Daotong doctrine was accepted officially by the nation for the first time. This historical event is significant in that Daotong discourse served as a momentum to decide the ideological direction of Joseon dynasty.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7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6-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1.11 | 1.11 | 1.03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1.03 | 1.05 | 2.153 | 0.42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