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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奉瑀의 민족운동 초기 활동과 『吾讐不忘 』의 편찬 = Bong-Woo Kye’ National Movement: Activity Early and Compilation of 『Ohsubulmang 』
저자
김대용 (서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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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작성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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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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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7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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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봉우는 평생을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역사학자이자 국문학자로 많은 저작들을 남겼으며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독립운동의 방향으로 결정하고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1906년 10월에 영흥의 홍명학교 설립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교편을 잡게 되었고, 1908년 태극학회, 서북학회, 신민회의 가입과 예수교에도 입교하여 함흥의 영생중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때의 활동을 통해 형성된 민족의식은 이후 그가 북간도와 아령지방을 넘나들며 펼쳤던 교육활동과 저술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910년 12월(음력) 계봉우는 북간도 小營子에 망명하여 예수교회와 교육활동에 주력하였다. 이것은 당시 청ㆍ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포교활동을 병행해 교육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1911년 길동기독학당(吉東基督學堂)에서 조선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며 교육활동을 꾸준히 전개하였으나, 이 학교는 3년 만에 폐교되었다.
1914년 봄, 연해주에서 『권업신문』의 기자와 대한광복군정부의 비서로 활동하던 중 정치적 한인 망명자에 대한 러시아의 퇴거명령으로 왕청 하마탕(蛤蟆塘)으로 이주하였다. 1916년 11월에는 용정영사관에서 파견한 경찰들에 의해 피체되어 치안법 위반으로 영종도에서 1년간 금고형을 받고 다음해 석방되었으나 고향에서 3년의 거주제한을 받았다.
계봉우가 북간도에서 편찬한 『오수불망』은 1916년 10월 북간도 수신구 제1소학교에서 밀정에 의해 입수되어 간도총영사관을 거쳐 일본외무성 외무대신에게 전해졌다. 일제는 『오수불망』의 저자가 ‘계봉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북간도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로부터 이미 ‘排日朝鮮人’으로 감시를 받고 있었음에도 취조 과정에서 『안중근전』만 문제 삼고, 『오수불망』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던 것을 볼 때 압수 물품에 없었거나 편찬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오수불망』이 간행된 시기는 1912년 초로, 계봉우가 북간도로 망명한 후 간민교육회에서 교과서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민족의식을 고양시킬 적합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편찬을 시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출간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학교들에서 사용되었으며, 외무성에 보고되었을 정도로 상당히 배일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수신교과서인 『오수불망』의 내용은 일본과 관계된 역사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수불망』은 삼국시대부터 일본의 침입 사실과 관계된 역사적 사건과 대한제국 시기,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정책과 만행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특히 고대사의 내용이 적은 반면 조선ㆍ대한제국 이후의 현대사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소학교 과정에 맞는 수신 교과서로 편찬했던 것으로 함께 중등 교재로 편찬하던 『조선역사』와 『신한독립사』에 있는 내용 중 ‘잊지 않아야 할 것’들을 발췌ㆍ축약해 저술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번역자에 의해 삭제, 오역, 왜곡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원본의 분량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계봉우는 일본을 讐敵의 대상으로 여기고,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의 함양과 일제 침략에 대한 저 ...
Bong-Woo Kye devoted his whole life to Korea independence movement and education. He was active as a journalist and even he published a variety of writings as a historian and Korean literature scholar. With Eulsa Protective Treaty of 1905, he gave his best at national sovereignty restoration, which was the main point of Korea independence movement, and he also developed national education movement.
He started teaching as participating in the founding of Hongmyung school in Youngheung in October 1906, and he became a Youngsang middle school teacher after he entered Taegeuk Society, Seobuk Society, Simin Congress, and Jesus Society in 1908. National consciousness formed through his participation had a strong influence on his educational and writing activity when he frequently crossed North-Gando and Aryung province.
Bong-Woo Kye also dedicated himself to the educational activity and Jesus Church as he sought refugee in Soyoungja of North-Gando in December 1910 (lunar calendar). That is because it was more advantageous to develop the educational activity in parallel with propagation in order to get out of the interference from China and Japan at that time. Gildong Christian School was established for teaching Korean history and geography in 1911, but it was closed down on the third year.
In Spring of 1914 when he was a secretary of Korea Independence Army Government and a reporter of Kwonup newspaper in Yunhaju of Russia, he moved to Wangcheong Hamatang by Russia's eviction order for the political korean refugee. In addition, he was arrested by the police dispatched from Youngjung embassy in 1916 and was sentenced to one-year prison term in Yeongjongdo due to public peace violation, but he was released from the prison next year. He got finally restriction on three-year residence term.
The book 『Ohsubulmang』, which he wrote in North-Gando, was given to the Minister of Japan Foreign Affairs through the Consulate General in North-Gando in October 1916, by a secret agent in the 1st elementary school of Susingu in North-Gando. It was assumed that Japan did not notice that the writer of 『Ohsubulmang』 was Bong-Woo Kye. This assumption is based on the fact that Japan interrogated only the book 『Anjoongkeuncheon』, not 『Ohsubulmang』, even if he was under Japan's surveillance called Baeiljuseonil in North-Gando and Yunhaju of Russia.
In the early of 1912 when 『Ohsubulmang』 was published, Bong-Woo Kye is thought to start writing suitable teaching materials for boosting national consciousness as being a textbook compilation member at Ganmin Educational Association after he fled to North-Gando. The book 『Ohsubulmang』 was used for national education at school, and it contained as much anti-Japanese content as it was reported to the Japan Foreign Affairs.
Furthermore, the book 『Ohsubulmang』 focused mainly on describing historical events related with Japan. It depicted in a chronological order the Japan's policy and brutality since Japan–Korea Annexation Treaty of 1910 as well as the historical events including Japan invasion from the era of the Three States. In particular it included the modern history contents since the Joseo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 whereas it lacked ancient history. The book is also assumed to be wrote as extracting and summarizing 'what should not be forgotten' from 『Joseon History』 and 『Shinhan Independence History』, which were published as the teaching materials of middle class. However, the point could not be excluded that the original amount of the book might be more in that there were deletion, mistranslation, and distortion done by a translator.
Bong-Woo Kye published the book 『Ohsubulmang』 for national education as following reasons; first, it focused on planting resistance consciousness against Japan invasion and fostering national consciousness through national education, as considering Japan as a main enemy. Another issue was that it had an explicit intenti...
분석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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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 | KCI후보 |
2001-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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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44 | 0.44 | 0.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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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 | 0.38 | 0.811 | 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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