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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對明 私貿易의 정책 방향과 굴레 - 中宗代 明의 ‘조선사행단 출입제한 조치’를 중심으로 - = Direction & Yoke of Private Trade with Ming Dynasty in the 16th Century
저자
구도영 (경희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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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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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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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동아시아는 전 지역에 걸친 생산력의 확대와 경제활동 범위의 확장으로 지역 간 교역 욕구가 분출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폐쇄적인 대외정책을 고집했던 明의 정치적 입장과는 이질적인 흐름이었으나, 동아시아 전반에 걸친 국제교역의 확대는 결국 1567년 明이 국초부터 祖宗成憲으로 지켜왔던 海禁政策을 부분적이나마 해제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16세기 각 국의 대명 무역 행태는 밀무역이나 약탈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는 민간 세력이 독자적으로 벌이는 횡포가 아니었으며, 대명 무역이 가져오는 이익을 얻고자 하는 官 세력의 개입 하에 이루어지는 교역 형태였다. 동아시아 전반에 걸친 생산력의 증대, 이에 따른 구매력 증가, 그리고 교환수단으로서의 銀 유통구조의 확대 등은 조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은 국초부터 明에게 ‘禮義之國’으로 인정되어 監察의 법망에서 보다 자유로웠으며 이 때문에 여타의 조공국에 비해 자유로운 교역을 할 수 있는 특혜를 받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발생한 ‘玉河館外 외 출입제한조치’는 1522년(중종 17) 禮部 郎中 孫存이 조선의 通事가 明의 관본 서책 구입을 지나치게 원칙적으로 반응하며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조치가 취해진 이후 조선인의 교역활동이 제한을 받게 되자, 이를 이용하여 명의 일부 상인들은 조선과의 교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이미 확보한 독점적 이익을 지속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출입제한조치가 지속될 수 있도록 禮部를 매수하기에 이르렀다. 명의 官權과 商權의 유착관계로 인하여 출입제한 조치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조선의 노력은 성취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응하는 조선의 입장과 논리는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신료들은 그간의 출입자유가 조선이 ‘예의지국’으로 인정받았기에 부여되었던 특혜였던 만큼, 출입제한조치의 발생은 조선이 예의를 잃었기 때문이며 그 원인은 재화를 탐하는 사무역 행위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사무역 때문에 조선에 대한 대우가 강등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위정자들은 기존에 누렸던 예우의 회복, 즉 출입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오히려 무역을 더욱 제한하고, 심지어 대명무역을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강경한 의견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성리학의 심화 속에서 조선은 예의지국이라는 대외적인 국가브랜드를 지키는 것이 대명 무역의 이익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16세기 사회경제적 환경이 변화하고 대명 사무역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기존의 사무역 정책이 재검토되어야 할 시기에 출현한 출입제한조치는 사무역을 여전히 비합법의 영역으로 둘 수밖에 없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즉 출입제한조치로 촉발된 ‘禮義之國’의 딜레마가 사무역 정책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입장 변화의 움직임을 봉쇄시켜 버렸던 것이다. 사무역의 확대는 시대적 대세였으나 정부는 그것을 끝내 외면하면서 정책적으로 통제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적 노력으로도 사무역이 철저히 금지되지도 못하는 가운데 이를 비합법적인 영역에 가둬버린 것은 결과적으로 정부와 백성에게는 이익이 되지 못하면서, 그것이 가져오는 막대한 차익을 일부 특권층과 부상대고만이 향유하게 되는 상황을 맞게 하였다.
명에게 ‘예의지국’이라는 평가는 그간 조선이 여타의 조공국보다 자유롭게 교역을 전개 ...
East Asia experienced eruption of craving for trade across different regions with the increased productivity and the expanded range of economic activity in the 16th century. Although such changes were inconsistent with the political position of Ming which adhered to the exclusive diplomatic policy, the expansion of international trade across entire East Asia played the role to partially mitigate the restricted trade policy adhered to by Ming from the early years since its foundation in 1567. The trade of each country with Ming sometimes took even the form of smuggling or plunder, which was not the tyranny committed independently by private organizations. It was a form of trade in which governmental power was involved in order to gain the profits from the trade with Ming. Joseon was not an exception in terms of the increased productivity, consequent increase in purchase power and the expansion of silver distribution.
Joseon was acknowledged as a 'courteous country(禮義之國)' by Ming and consequently free from its inspection network. For this reason, Joseon was privileged to trade more freely than other tributary countries. Under this environment, the action of 'Limited Access besides Okhagwan(玉河館)' was caused by the excessively strict response of Joseon translator to the purchase of government-published books by Ming. However, as the trade activities of Joseon merchants were restricted by this action, some merchants of Ming used this situation to monopolize the trade with Joseon. Furthermore, they began to buy the Courtesy Department off to maintain their monopolistic privilege by sustaining the action of limited access. Due to the back-scratching relationship between government and merchant of Ming, the effort to appeal the unfairness of the action of limited access was not successful.
However, the position and rationale of Joseon in responding to this event was quite different from those of other East Asian countries. The vassals asserted that the past privilege of free access had been granted to Joseon for Ming's acknowledgement of Joseon's courtesy and attributed the cause of the action of limited access to the loss of courtesy of Joseon which was in turn caused by the greedy private trade for wealth. The politicians who felt ashamed of the degraded treatment of Joseon due to private trade suggested that the private trade should be restricted more and even abolished. Under the condition at that time in which Neo-Confucianism was intensified, maintaining Joseon's national brand as a country of courtesy is more important than profits from the trade with Ming.
As the socio-economical environment changes in the 16th century and the private trade with Ming was expanded in a full scale, the action of limited access which appeared during the period requiring reconsideration of past policy for private trade became a symbolic event in which private trade should be placed in the illegal domain. In other words, the dilemma of 'a country of courtesy' blocked the various considerations and the movement to change the position in private trade policy. Although The expansion of private trade was the needs of the times, Joseon government ignored it and put its efforts in controlling it with policy. However, while the private trade was not entirely prohibited even with such political efforts, restricting it within the illegal domain did not result in any benefit for both government and people but the situation in which very few privileged class and large wealthy merchants enjoyed huge benefits from it. Although the acknowledgement of 'a country of courtesy' by Ming was the cause for Joseon's freer trade than any other tributary countries, it was also the yoke which restricted Joseon in expanding private trade more actively. Joseon was the only country among tributary countries which placed private trade in the controlled domain, which was considered as a special trade form with Ming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ast Asian tra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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