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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誌銘과 문헌자료를 통해 본 백제멸망 전후 禰氏의 활동 = Activities of Ye Family around the time of Baekje’s collapse through the analysis of four epitaphs and literature record
저자
김영심 (가천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3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207-235(29쪽)
KCI 피인용횟수
9
제공처
본 논문에서는 최근 발견된 백제유민 禰氏 가족 4명의 묘지명과 문헌자료를 통해 백제멸망을 전후한 시기의 禰軍과 禰寔進의 이중적 활동상을 살펴보았다. 禰氏 가족 묘지명의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이를 무조건 부정하기보다는 기존의 문헌자료와 연계시켜 합리적으로 해석해보고자 했다.
禰氏는 5세기 초에 백제로 이주한 중국 출신 세력이었다. 웅진지역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워갔으며, 무왕대에는 중앙정계에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 멸망시 熊津方領이었던 禰寔進과 그의 형 禰軍은 의자왕이 당에 투항할 때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공을 인정받아 당의 관직을 제수받았고, 당의 백제 故地 지배정책에 적극 참여했다. 禰寔進은 웅진도독부 예하의 東明州의 刺史로 활약했으며, 禰軍은 664년과 665년 두 차례에 걸쳐 왜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또 670년 熊津都督府 司馬로서 신라에 가는 등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하였다.
<禰軍墓誌銘>에 기재된 禰軍의 활동 내용과 그가 받은 관작을 근거로 묘지명에 나오는 ‘日本’과 ‘僭帝’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日本’과 ‘僭帝’라는 표현이 나오는 부분은 660년 泗沘都城의 함락과 의자왕의 항복부터 663년 백제 부흥운동의 종말까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僭帝는 의자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서기』에도 기록된 禰軍의 일본 방문이 백강전투의 수습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 663년 백강 전투에 일본군이 2만 7천이나 참여했으나 대패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日本餘噍’의 ‘日本’이 국호로 쓰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한국이나 중국측 기록에서 사용되고 있는 다른 사례와 함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고찰할 필요가 있다.
禰氏 가족 묘지명은 중국 출신 禰氏 가문의 백제 정착의 기록이자 백제멸망 이후 당의 관리로서의 활약상에 대한 기록이다. 禰軍과 禰寔進이 백제멸망시 보여주었던 모습은 이들이 백제사회에 정착했으되, 여전히 중국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는, ‘二重性’을 띤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禰氏 가족 묘지명은 주민의 이동과 교류가 활발했던 고대사회에서 이주민들이 어떤 소속 의식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고찰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This paper explores the controversial activities of two Ye’s family members, Ye Gun(禰軍) and Ye Shikjin(禰寔進), around the time of Baekje’s collapse through the analysis of four epitaphs of Ye family and related historical documents.
Though Ye family moved into Baekje from China around the early part of the 5th century and settled in the Ungjin, far away region from Capital city, they secured the important position in the central government at the reign of King Mu. Ye Gun and his younger brother Ye Shikjin, who was Ungjin Bangryeong(方領, Province governor), distinguished themselves at the surrender of King Euija to Tang. They received the governmental post of Tang as rewards for their contribution, and participated actively in the ruling over the former territory of Baekje. Ye Shikjin was the General of Dongmyeong-Ju(東明州) under the Ungjin Commandery. Governmental duty of Ye Gun was specialized in diplomatic affairs including two times of dispatch to Wa as an ambassador and one time of visit to Shilla as a chief of staff of Ungjin Commandery.
This paper tries to identify the words ‘日本’ and ‘僭帝’, which appeared in the epitaph of Ye Gun. Main argument for my assertion on the definition of the words ‘日本’ and ‘僭帝’ is that key incidents on the epitaph showing off Ye Gun’s public services were happened between 660, when Baekje collapsed, and 663, when the restoration movement of Baekje ended. Therefore, it is reasonable to identify ‘僭帝’ as King Euija of Baekje. Considering the purpose of Ye Gun’s visit to Wa was the resolution of problem aroused during the Baek River(白江) battle and the number of Wa’s armed forces who were deployed to the Baek River battle was 27,000, “日本” on the epitaph of Ye Gun might be the name of country Japan.
The epitaphs of Ye’s family are the recordings of establishment of Ye’s family, who were the Chinese immigrants to Baekje, in the society of Baekje, and also the recordings of public activities of Ye’s family members as public officers of Tang after the collapse of Baekje. The activities of Ye Gun and Ye Shikjin during the era of Baekje’s collapse showed their duality from the point that though Ye’s family became the nationals of Baekje, they also kept their identity as Chinese people.
The epitaphs of Ye’s family is the important recordings which showed the sense of identity and affiliation of immigrants from foreign countries in ancient societies, when the migration and interchange of inhabitants were frequent.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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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 평가예정 |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 |
2020-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 KCI등재 |
201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 KCI등재 |
2013-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0-01-01 | 평가 |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 KCI등재 |
2008-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6-06-10 | 학술지명변경 | 한글명 : 전남사학 -> 역사학연구 | KCI등재 |
2006-03-21 | 학회명변경 | 한글명 : 전남사학회 -> 호남사학회영문명 : Chonnam Historical Association -> Honam Historical Association | KCI등재 |
200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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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0.68 | 0.68 | 0.68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0.63 | 0.6 | 1.183 | 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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