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潛冶 朴知誡의 삶과 행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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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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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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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346(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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潛冶 朴知誡는 京華士族으로 서울 돈의문 밖 盤松坊에 기반을 둔 지역적 연고와 함께 정치적으로 서인 세력과 연결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12년간 제천, 괴산에 옮겨 살다가 서울 本第로 귀경했지만 광해군의 집권기에 대북정권의 독주와 거듭되는 亂政을 피해 충청도 新昌으로 移居하였다. 그 사이 한동안 경기도 南陽으로 옮겨간 적은 있지만 종신토록 아산에서 살았다. 이후에 子姪이 뿌리를 내려 현재까지도 후손들이 아산에 살고 있다.
박지계는 젊어서부터 벼슬을 거부하고 평생 성리학 연구에 열중하는 도학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신창으로 옮겨와서도 오랜 지기인 權得己와 趙翼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성리학에 대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한편 趙克善을 비롯한 많은 문인, 제자를 기르는 講學 활동도 쉼 없이 이루어져 17세기 牙山지역 유학의 전통을 세우고 기반을 넓히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金長生, 張顯光과 함께 명망있는 山林處士로 존숭되어 新政을 도울 宿儒로 조정에 초빙되었다. 하지만 反正이란 특수한 정치 상황에서 발생한 王統의 계승 문제와, 이에 따른 禮論과 服制 문제로 조정 중신뿐 아니라, 김장생 등 주류학자와 대립하였다. 이에 따라 오랫동안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됨에 따라 찬사와 질시를 동시에 받는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학문적 신념에 대한 일관성 있는 그의 주장은 마침내 관철되어 元宗追崇 문제는 박지계의 의지대로 결정이 되었다.
박지계는 사후에 아산의 五賢書院, 곧 仁山書院에 배향되어 아산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17세기 아산에 새로 入鄕하여 학문과 교육으로 아산지역의 유학적 전통과 기반을 확대하고 그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따라서 17세기 아산 儒學의 형성에 초석을 놓은 인물이 바로 잠야 박지계라 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은 아산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기에 앞으로도 계속 크게 조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Jam-ya, Park Ji-gye had not only a regional connection with Gyeonghwasajok faction (noble families living both in and around Hanyang) based on Bansongbang, outside Seoul"s Donuimun Gate, but also had a political connection with Seo-in party. He returned to his home in Seoul after having moved around Jecheon and Goesan for 12 years due to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However, during the reign of King Gwanghaegun, he moved to Shinchang, Chungcheong-do Province, in order to avoid the dictatorship of Daebuk faction and repeated political noise in administration. In the meantime, he moved to Namyang, Gyeonggi-do Province for a while, but he lived in Asan for the rest of his life. As a result, his descendants have still lived in Asan to this day.
From a young age, Park Ji-gye refused to hold an official position and lived a life of a moralist enthusiastically devoted to the study of Neo-Confucianism for the rest of his life. Even after moving to Shinchang, he actively interacted with his longtime friends, Kwon Deuk-gi and Jo Ik, immersing himself into an academic research on Neo-Confucianism. Meanwhile, many literary scholars and followers, including Jo Geuk-seon, were constantly raised in ceaseless teaching and learning activities, which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establishing the tradition of Confucianism in the Asan in the 17th century and in broadening its foundation.
After Injo banjeong (the coup of 1623), he was respected as Sanlimcheosa (a prestigious officer in nature) along with Kim Jang-saeng and Jang Hyeon-gwang, and was invited to a palace as a renowned scholar to help the new rulers. However, he confronted not only the palace officials but also mainstream scholars such as Kim Jang-saeng over the issues of righteous succession of the King, which arose in the special political situation of anti-government, accordingly, along with issues of funeral related manners and custom.
As a result, he has been at the center of controversy for a long time, making him both admired and envied at the same time. However, his consistent argument on academic beliefs was finally carried out, and the issue of Wonjongchusong(元宗追崇) was decided according to the will of Park Ji-gye.
Park Ji-gye was later enshrined in Ohhyeon-seowon Confucian Academy, that is, Insan-seowon Confucian Academy, now becoming a historic part in Asan. In the 17th century, he newly entered Asan area and contributed to expanding the Confucian tradition and foundation of the Asan region through learning and education and to raising its academic level. Therefore, it is obvious that Jamya, Park Ji-gye was the person who laid the foundation for the formation of Neo-Confucianism in Asan in the 17th century. Today, this tradition has become the basis for shaping the identity of Asan, so it should continue to be widely discussed in a long te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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