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SCOPUS
正祖代 御眞과 신하초상의 제작 -초상화를 통한 군신관계의 고찰- = The Portraits of the King and His Courtiers during Jeongjo’s Reign : The Monarch-Subject Relationship Reflected in Portraiture
저자
유재빈 (서울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11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SCOPUS
자료형태
학술저널
발행기관 URL
수록면
145-172(28쪽)
KCI 피인용횟수
7
DOI식별코드
제공처
King Jeongjo (r.1776-1800), following his grandfather King Yeongjo’s (r.1725-1776)precedent in which the king had his own portrait painted every ten years, ordered his portrait to be painted twice, in 1781 and in 1791. A custom of the reigning king having his portrait painted existed in the early Joseon period, but disappeared after King Sejong’s (r.
1418-1450) time. The custom was revived centuries later during King Sukjong’s reign (1674-1720) and was inherited by King Yeongjo. Unlike the portrait of a deceased king, the portrait of a reigning monarch was not a commemorative work, but something that was meant to be venerated by his current subjects. With this custom revived, the portrait of a king once again influence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ruler and his subjects. Meanwhile, during Jeongjo’s reign, while the custom of painting the portrait of the reigning king was upheld,the associated practice of producing the so-called portraits of meritorious retainers was not revived. This imbalance makes the portraiture of the king in Jeongjo’s time, closely related to the portraiture of his courtiers, so interesting.
During Jeongjo’s time, Kyujanggak was in charge of both the production and placement of his portraits. As a result, Kyujanggak became something close to a workshop of the king’s portrait artists, and its officials participating in the creation of the king’s image.When the king’s portrait was completed, it was housed in Kyujanggak, along with the portraits of Kyujanggak officials. Kyujanggak officials, further, regularly paid respects to the king’s portrait housed there. This royal portrait-related practice empowered Kyujanggak,and the king’s portrait, in turn, influenced, through Kyujanggak,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narch and his courtiers during Jeongjo’s reign.
Jeongjo’s portrait influenced his relationship with his courtiers in a very concrete manner,also through the practice called cheommang and cheombae . While the king’s portrait was still in the process of being produced, Jeongjo and his courtiers gathered to look at the portrait in progress (cheommang ), having discussions, at the same time,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suzerain and vassals. When the king’s portrait was completed, Jeongjo’s courtiers were made to perform the ritual of bowing to the portrait (cheombae ). The portrait truly became the king’s portrait through the ritual of enshrinement, and the regularly-performed ritual of worshipping it, meanwhile, affirmed the monarch’s authority.
In addition to gatherings related to his own portraits, Jeongjo also had gatherings about portraits of his officials; providing more occasions for discussing the relationship between suzerain and vassals. During gatherings for discussing the king’s portrait, portraits of Jeongjo’s courtiers were also on display. Jeongjo’s portrait artists, meanwhile, took part in the creation of portraits of Jeongjo’s courtiers. The stated purpose of viewing court officials’portraits was to use them as references in the creation of the king’s portrait, and the king’s order that the portrait of an official be painted was something akin to a reward to this official.
But, the real effect of this gesture was far greater. Jeongjo used portraiture as a carrot and stick approach to controlling his courtiers by awarding or denying a portrait to them, as it suited his agenda. This strategy, in many cases, proved effective in eliciting an active response from his courtiers. Such process of influencing the relationship with a court official by awarding or denying a portrait can be seen in examples like the portrait of Chae Je-gong, created in 1791,following the completion of the king’s portrait.
If Kyujanggak was a political space that the king co-inhabits with his courtiers through portraits, the creation of the king’s portrait was the significant event that created such a ritualistic space. In sum, in Jeongjo’s court, a port...
正祖(재위 1776~1800)는 10년마다 자신의 어진을 제작한 영조의 전례에 따라 1781년과 1791년 어진제작을 명하였다. 이처럼 왕이 재위시 자신의 초상을 제작한 전통은 世宗이후 사라졌다가 肅宗代에 부활한후 英祖에 의해 계승된 것이었다. 현임 왕의 어진은 죽은 先朝의 어진과는 달리 왕실 제향의 대상이 아니라신하들의 경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어진은 다시 현재의 군신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조대에는 어진에 대한 전통은 부흥하지만 공신도상은 그려지지 않아서 초상 제작이 불균형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하초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정조의 어진 제작 사례는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조는 어진의 제작과 봉안을 모두 奎章閣에서 맡아 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규장각 원내는 어진도사가 이루어지는 장이 되었으며, 규장각 각신들은 왕실의 성역에 참여하는 공신이 되었다. 어진이 완성된 후규장각은 어진과 규장각신의 초상이 함께 봉안된 곳이었으며, 어진이 규장각신의 의례를 받으며 정기적으로봉심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규장각은 어진을 통해 위상이 강화되었고, 어진은 규장각을 통해 현재군신관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정조의 어진이 현재적 영향력을 갖는 또 다른 지점은 신하들로부터 받는 ‘瞻望’과 ‘瞻拜’이다. 어진은제작 기간 동안 첨망을 통해 군신 관계에 대한 담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완성된 어진에게는 절하는 의식이포함된 첨배를 행하게 하였는데, 봉안 의례를 통해 정조의 초상화는 어진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며, 정기적인봉심 의례를 통해 국왕이 규장각에 현현하는 것을 재현할 수 있었다.
정조의 어진 도사는 왕의 초상만이 아니라 신하 초상을 위한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초상을 통한 군신관계의 논의를 확대하였다. 어진을 논하는 같은 자리에서 신하 초상이 열람되었으며, 어진을 제작한 화사에의해 참여 신하들의 초상이 제작되었다. 신하 초상이 열람된 명목은 어진 제작에 참고하기 위함이었고, 신하 초상의 제작은 공로에 대한 포상의 성격을 띠었지만 실제적인 효과는 이를 넘어섰다. 정조는 신하 초상을회유와 견제의 방편으로 사용하였고, 이는 적극적으로 신하의 응답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1791년 어진 도사후 그려진 蔡濟恭의 초상화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규장각이 어진과 신하 초상이 공존하는 정치적 공간이었다면 어진도사는 이들이 의례적 맥락에서 보여질 수 있게 한 계기였다. 결국 규장각에서의 어진도사를 통해 정조의 조정에서 초상화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기념물에서 나아가 현재의 군신관계를 정립하는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
분석정보
연월일 | 이력구분 | 이력상세 | 등재구분 |
---|---|---|---|
2023 | 평가예정 | 계속평가 신청대상 (등재유지) | |
2018-01-01 | 평가 | 우수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 |
2015-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11-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9-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7-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 KCI등재 |
2004-01-01 | 평가 |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 KCI등재 |
2003-01-01 | 평가 |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2-01-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 KCI후보 |
2000-07-01 | 평가 |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 KCI후보 |
기준연도 | WOS-KCI 통합IF(2년) | KCIF(2년) | KCIF(3년) |
---|---|---|---|
2016 | 1.02 | 1.02 | 1.27 |
KCIF(4년) | KCIF(5년) | 중심성지수(3년) | 즉시성지수 |
1.12 | 1.04 | 1.591 | 0.13 |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