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I등재
부산출신 金仁泰 ․ 金鉼泰 형제의 생애와 독립운동 = A Life-course Study of Two Korean Independence Fighters - Kim Intae and Kim Byungtae, the Busanese Brothers -
저자
김영범 (대구대학교)
발행기관
학술지명
권호사항
발행연도
2022
작성언어
Korean
주제어
등재정보
KCI등재
자료형태
학술저널
수록면
403-446(44쪽)
KCI 피인용횟수
0
DOI식별코드
제공처
This article is prepared primarily to examine and clarify the entire life course and path through independence movement of Kim Byungtae(金鉼泰), who was a cadre member of the Euiyeoldan(義烈團). In addition, similar path and facts related to his elder brother Kim Intae(金仁泰) are investigated and illuminated as far as possible for the first time.
The brothers were born in 1896 and 1899 respectively in Dongnae(東萊) County, which has been transformed to be a main area of the present Busan Metropolitan City. The two men began to follow the anti-Japanese course samely after graduating from middle school. In 1915, Kim Intae went to China, and entered a college in Shanghai. About the beginning of the year of 1919, he participated in the New Korean Youngmen’s Party(新韓靑年黨) and infiltrated the fatherland to prepare for the March 1st Movement. Successively he went to Paris, and worked as an agent of the Communication Bureau of the Korean Delegation to the Paris Peace Conference during several months, using the pseudonym ‘Kim T´ang’(金湯). Though his acts and whereabouts after the move to the United States with Kimm Kiusic(金奎植) are remained unclear, it is confirmed that he returned to Korea in 1933 and went again to China a year later, unfortunately followed by being forced to return home by the Japanese police.
Kim Byungtae who had exiled to China in 1918 joined the Euiyeoldan in Shanghai in 1920, and contributed to the bombing undertaking by Park Jaehyuk(朴載赫) against the Busan Police Station. Then he acted constantly at the center of the ranks of Euiyeoldan Movement until 1935, as a secretary to and a sworn brother of Kim Wonbong(金元鳳), the all-the-time head of the organization. After the foundation of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朝鮮民族革命黨), he served continuously in the central executive committee of the party until 1945, especially as a secretary and the closest aide to Kim Wonbong, under the pseudonym ‘Kim Bin’(金斌) or ‘Cho Bin’(曺斌). Even after the August 15th Liberation, he remained in Shanghai to maintain the legacy of the N.R.P., at the same time to manage the party’s foreign relationship with the Chinese authorities. Thus he lived in China at least until 1957, and seemingly met the end of life there.
이 글은 의열단운동과 부산(사람들)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부산출신 의열단 간부였던 김병태의 독립운동 행로를 생애과정 연구의 관점에서 전면 고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쓰인 것이다. 곁들여 필자는 그의 형 김인태의 생애도 독립운동 행보와 그 좌절에 초점을 맞추면서 처음으로 추적 탐사해 보았다.
동래 좌천동에서 각기 1896년과 1899년에 태어난 형제는 중학 졸업 무렵부터 민족의식을 벼리며 항일행로를 밟기 시작했다. 1915년 상하이로 건너간 김인태는 대학을 다니다 1919년 신한청년당원이 된 것으로 보이며, 3.1운동 준비를 위한 국내잠입 활동 후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부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김탕’이라는 이명으로 활약했다. 그러다 곧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한인사회의 정치적 기류에 잘 융합되질 못했는지 뜻을 펴지 못하고 내내 소외되는 처지에 놓여 있다가 1933년에 귀국했다. 1년 후 새 포부를 품고 중국으로 갔지만 일경에 의해 강제 송환되고 마는 비운을 겪었다.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한 김병태는 1920년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박재혁의 부산의거가 성사됨에 기여했고, 김원봉의 의형제이자 기밀비서가 되어 1935년까지 줄곧 의열단운동 대오의 중심부에서 활동했다. 민족혁명당 창당 후에도 내내 기밀비서 직을 맡아 1945년까지 김원봉의 정치적 보좌역을 자담했다. 일찍이 한 중국인의 양자가 되어있던 그는 8.15 광복 후에도 상하이에 남아 10년 이상 재류하면서 처음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인민공화당의 명맥 유지에, 뒤에 가서는 한인사회 결속에 주력했다. 형제는 둘 다 심지 굳은 독립운동가로 살아가려 했음이 분명하고 정치적 선택에서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각자의 입지와 성취도와 생애 후반의 모습에서는 상이점이 꽤 있었음도 확인된다.
분석정보
서지정보 내보내기(Export)
닫기소장기관 정보
닫기권호소장정보
닫기오류접수
닫기오류 접수 확인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닫기음성서비스 신청 확인
닫기이용약관
닫기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약관 (2017년 1월 1일 ~ 현재 적용)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이하 RISS)는 정보주체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위해 「개인정보 보호법」 및 관계 법령이 정한 바를 준수하여, 적법하게 개인정보를 처리하고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개인정보 보호법」 제30조에 따라 정보주체에게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절차 및 기준을 안내하고, 이와 관련한 고충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개인정보 처리방침을 수립·공개합니다.
주요 개인정보 처리 표시(라벨링)
목 차
3년
또는 회원탈퇴시까지5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3년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2년
이상(개인정보보호위원회 : 개인정보의 안전성 확보조치 기준)개인정보파일의 명칭 | 운영근거 / 처리목적 | 개인정보파일에 기록되는 개인정보의 항목 | 보유기간 | |
---|---|---|---|---|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이용자 가입정보 파일 | 한국교육학술정보원법 | 필수 | ID, 비밀번호, 성명, 생년월일, 신분(직업구분), 이메일, 소속분야, 웹진메일 수신동의 여부 | 3년 또는 탈퇴시 |
선택 | 소속기관명, 소속도서관명, 학과/부서명, 학번/직원번호, 휴대전화, 주소 |
구분 | 담당자 | 연락처 |
---|---|---|
KERI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정보보호본부 김태우 | - 이메일 : lsy@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439 - 팩스번호 : 053-714-0195 |
KERI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개인정보보호부 이상엽 | |
RISS 개인정보 보호책임자 | 대학학술본부 장금연 | - 이메일 : giltizen@keris.or.kr - 전화번호 : 053-714-0149 - 팩스번호 : 053-714-0194 |
RISS 개인정보 보호담당자 | 학술진흥부 길원진 |
자동로그아웃 안내
닫기인증오류 안내
닫기귀하께서는 휴면계정 전환 후 1년동안 회원정보 수집 및 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으신 관계로 개인정보가 삭제되었습니다.
(참조 : RISS 이용약관 및 개인정보처리방침)
신규회원으로 가입하여 이용 부탁 드리며, 추가 문의는 고객센터로 연락 바랍니다.
- 기존 아이디 재사용 불가
휴면계정 안내
RISS는 [표준개인정보 보호지침]에 따라 2년을 주기로 개인정보 수집·이용에 관하여 (재)동의를 받고 있으며,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휴면계정으로 전환됩니다.
(※ 휴면계정은 원문이용 및 복사/대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휴면계정으로 전환된 후 1년간 회원정보 수집·이용에 대한 재동의를 하지 않을 경우, RISS에서 자동탈퇴 및 개인정보가 삭제처리 됩니다.
고객센터 1599-3122
ARS번호+1번(회원가입 및 정보수정)